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작은 그림을 처음 만나면 조금 의외일 수 있다.
세로 54.5cm, 가로 42cm. 웅장한 제단화도 아니고 사람을 압도할 만큼 큰 그림도 아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무판 안에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인간과 공간, 종교와 현실이 놀라울 정도로 압축되어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모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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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아 만테냐 작《성모의 죽음》 |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작품을 약 146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만테냐가 고향과도 같았던 파도바를 떠나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모가 누워 있는 방이 아니라,
만테냐가 새롭게 들어간 도시 만토바부터 바라봐야 한다.
만테냐가 만토바로 간 이유
안드레아 만테냐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화가다.
그는 파도바에서 프란체스코 스콰르초네에게 배우며 성장했다.
스콰르초네는 화가이면서 고대 유물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고, 만테냐 역시 일찍부터 고대 로마의 조각과 건축에 매료되었다.
당시 파도바에는 또 하나의 강력한 자극이 있었다.
조각가 도나텔로가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만테냐의 인물이 유난히 단단하고 조각처럼 느껴지는 데에는
이런 환경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베네치아 미술과의 연결도 생겼다.
만테냐는 1453년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 야코포 벨리니의 딸
니콜로시아와 결혼했다.
벨리니 가문과 가족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북이탈리아의
작은 궁정 도시 만토바에서 찾아왔다.
만토바를 지배하던 곤차가 가문은 만테냐를 자신들의
궁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결국 그는 1459년 파도바를 떠났고,
1460년부터 만토바에서 후작 루도비코 3세 곤차가를 섬기는
궁정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 선택은 만테냐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이후 15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곤차가 가문과 긴 관계를 이어간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모의 죽음》은 바로 그
새로운 출발점에 가까운 작품이다.
작은 도시가 문화로 힘을 보여주던 시대
15세기 이탈리아는 오늘날처럼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공국, 공화국,
교황령이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만토바를 지배하던 곤차가 가문도 그 경쟁 속에 있었다.
규모만 놓고 보면 만토바는 피렌체나 베네치아 같은
거대한 중심지와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예술은 더욱 필요했다.
궁전과 교회, 그림과 조각, 고대 문화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궁정이 얼마나
세련되고 교양 있는 곳인지 보여주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뛰어난 예술가를 궁정에 두는 일 역시 그 힘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루도비코 곤차가에게
만테냐는 단순히 그림 몇 점을 주문할 화가가 아니었다.
궁정 전체의 문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가였다.
실제로 만테냐는 이후 만토바의
산 조르조 성에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카메라 델리 스포지’,
흔히 《신혼부부의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을 완성한다.
하지만 《성모의 죽음》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속한다.
만테냐가 새 주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하던 때의 그림인 셈이다.
이 그림은 원래 미술관에 걸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프라도 미술관의 벽에서 《성모의 죽음》을 본다.
하지만 처음부터 독립된 한 점의 그림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라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림은 루도비코 곤차가가
만토바의 산 조르조 성 안에 마련한
작은 개인 예배당을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예배당은 궁정의 사적인 종교 공간이었다.
만테냐는 이곳을 위해 여러 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 《할례》,
《승천》도 이 예배당의 장식과 관련된 작품들로 여겨진다.
다만 당시 예배당의 전체 장식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작품들의 원래 배치와 구성에 대해서도 연구자들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프라도에서
한 점의 그림으로 만나는 《성모의 죽음》이
원래는 하나의 종교적 공간 속에서 다른 이미지들과
관계를 맺으며 보이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의 성격이 달라진다.
미술관 벽에 걸린 아름다운 르네상스 회화 한 점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고 예배하던 장소에 놓였던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성모의 죽음’인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의 정경에는 성모 마리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쳤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외경과 중세에 전해진 여러 전승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성모는 자신의 지상 생애가 끝날 것을 알게 되고,
사도들이 기적적으로 그녀 곁에 모인다.
다만 인도에서 전도하고 있던 토마스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
만테냐의 그림 역시 이 전승을 바탕으로 한다.
프라도 미술관은 화면에 성모와 함께
열한 명의 사도가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토마스가 빠져 있는 것이다.
이 주제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성모의 죽음은 끝이라기보다 지상의 삶에서
천상의 삶으로 옮겨가는 순간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스페인어 작품명도 흔히 ‘죽음’을 직접 뜻하는 표현보다
《El Tránsito de la Virgen》, 즉 성모의 ‘이행’ 또는 ‘통과’를
뜻하는 제목을 사용한다.
죽음을 그리면서도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그림은 아닌 셈이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원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알고 봐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현재 프라도에 있는 《성모의 죽음》은 원래 그림의 전체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따르면 그림의 위쪽 약 3분의 1이 사라졌다.
그 잘려나간 부분과 연결되는 조각이
현재 이탈리아 페라라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성모의 영혼을 맞이하는 그리스도》로 알려져 있다.
원래의 구성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훨씬 명확해진다.
아래에서는 성모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펼쳐지고,
그 위에서는 그리스도가 성모의 영혼을 맞이하는
천상의 장면이 이어졌던 것이다.
지상과 천상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연결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작품의 윗부분이 잘려 나가면서
두 장면은 서로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 프라도에서 보는 그림만 바라보면 상당히 현실적이고
절제된 임종 장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원래 모습에서는 그 위로 초월적인 세계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작품을 볼 때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만테냐가 처음 완성한 화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이야기를 자기 시대의 공간으로 끌어오다
만테냐가 이 작품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변화는
성모의 죽음을 먼 옛날의 막연한 성스러운 공간에만 가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림 뒤편으로 열린 풍경은 실제 만토바 주변의 지형과 연결된다.
프라도는 이 풍경을 이탈리아 회화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나타난 지형학적 풍경 표현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
만토바를 둘러싼 호수와 다리, 산 조르조 지역이 화면 너머에 나타난다.
이 선택은 꽤 대담하다.
성모의 마지막 순간은 성서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만테냐는 그 장면의 뒤에 자신이 살고 있던
15세기 만토바의 현실 세계를 열어놓았다.
성스러운 역사가 관람자의 현실과 만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르네상스 미술을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단서가 된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종교 이야기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종교 이야기를 자신들이 보고 경험하는
현실의 공간과 인간의 몸, 건축과 자연 속에서 새롭게 보여주려 했다.
만테냐에게 원근법도 단순한 기술 자랑이 아니었다.
화면 속 공간을 실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만들고,
오래전의 사건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끼게 하는 수단이었다.
만테냐에게 공간은 그림의 뼈대였다
만테냐는 고대 조각과 건축을 좋아했고
정확한 원근법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그림에서 사람과 건축은 물렁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형태가 단단하게 서고, 공간은 계산된 질서를 가진다.
《성모의 죽음》에서도 그런 성향이 나타난다.
프라도는 이 작품에서 수평과 수직의 관계, 원근법의 통제,
사도들 얼굴의 개별적인 표현, 그리고 뒤쪽 풍경의 처리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이것은 2편에서 직접 화면을 보며 확인할 부분이다.
지금은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만테냐에게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그림을 진짜처럼 그리는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화면 안에 질서를 세우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성모의 죽음처럼 감정적으로 격렬해질 수도 있는 사건조차
그의 손에 들어가면 이상할 만큼 차분하고 엄격한 공간 안에 놓인다.
슬픔을 과장하기보다 질서 속에 담아낸다.
만토바에서 영국으로, 다시 스페인으로
이 그림의 여행도 만만치 않다.
곤차가 가문을 위해 만들어졌던 작품은 훗날 그들의 손을 떠났다.
17세기에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컬렉션에 들어갔다.
찰스 1세는 유럽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한 군주였고
곤차가 가문의 소장품 가운데 상당수를 구입했다.
하지만 영국 내전 이후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된다.
왕의 미술품도 흩어졌다.
이때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를 위해 작품이 구입되면서
《성모의 죽음》은 스페인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만토바의 작은 궁정 예배당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 곤차가 가문을 떠나
영국 왕의 컬렉션을 거쳤다가 다시 스페인 왕실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1829년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왔다.
오늘 우리가 마드리드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데에는
이런 복잡한 유럽 왕실 컬렉션의 이동이 숨어 있다.
작은 그림 앞에서 먼저 기억할 것
《성모의 죽음》은 크기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그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패널 뒤에는
15세기 북이탈리아의 궁정 문화가 있고, 곤차가 가문의 야심이 있고,
파도바에서 만토바로 삶의 무대를 옮긴 젊은 만테냐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된 성모의 죽음에 관한 종교적 전승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이
원래 작품의 일부만 남은 모습이라는 사실이 있다.
이 배경을 알고 작품 앞에 서면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성모가 죽음을 맞는 먼 옛날의 사건을 그린
종교화라고만 생각했던 화면 뒤로
실제 만토바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성스러운 이야기와 현실의 도시가 한 화면에서 만난다.
바로 그 지점에 만테냐가 살았던 르네상스가 있다.
오래된 신앙의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의 눈은 달라졌다.
인간이 서 있는 공간을 계산하고, 실제 도시를 관찰하고,
자연을 바라보고, 눈앞의 세계를 그림 속에 설득력 있게 세우려 한다.
《성모의 죽음》은 그래서 조용하다.
그러면서도 그 작은 화면 안에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던
시대의 시선이 선명하게 들어 있다.
프라도에서 이 작품을 만난다면 크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자.
만테냐가 500년도 더 전에 만든 작은 창 하나가 그곳에 열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