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서 클라라 페테르스를
한 작품으로 시작한다면 《꽃, 은도금 잔이 있는 정물》을 골라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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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 페테르스 작《꽃, 은도금 잔이 있는 정물》 |
1611년에 나무판 위에 유채로 그린 작품이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은 페테르스의 정물화 네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제목부터 길다. 꽃, 술잔, 과일, 과자, 빵, 포도주, 주전자까지 식탁 위 물건을 하나하나 불러준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그림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지금은 꽃병이나 음식만 그린 그림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17세기 초 유럽에서 이런 그림은 비교적 새로운 회화였다.
왕이나 성인,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식탁 위의 물건들이 화면의 주인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빠르게 일어난 장소 가운데 하나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이었다.
클라라 페테르스는 그 변화의 아주 이른 시기에 등장한 화가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물건이 들어오다
서양 회화에서 오랫동안 가장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었다.
교회를 위한 종교화가 있었고, 고대 신화와 역사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그림이 있었다.
왕과 귀족은 자신의 권위와 가문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했다.
그에 비하면 음식이나 그릇, 꽃 같은 것은 그림의 중심이라기보다 주변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성모 앞의 꽃병이 될 수도 있었고, 최후의 만찬에 놓인 음식이 될 수도 있었다.
물건은 있었지만 대개 더 큰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이르면 북유럽 회화에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꽃은 꽃만으로 한 화면을 차지하고, 생선과 고기는 그것들만으로 그림이 된다.
과일과 빵, 치즈와 술잔이 탁자 위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물화’가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다.
페테르스가 활동을 시작한 17세기 초에는 아직 이런 정물화가
훗날처럼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그녀가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남부와 북부 네덜란드의 소장품에서 이런 종류의 그림은 아직 많지 않았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정물화에 대한 취향이 크게 성장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페테르스는 이미 완성된 유행을 따라간 화가라기보다
정물화라는 장르가 막 성장하던 순간에 그 가능성을 붙잡은 화가에 가깝다.
무대는 17세기 초 안트베르펜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안트베르펜을 봐야 한다.
페테르스의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어 있지 않지만,
그녀가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여러 개 남아 있다.
그녀가 사용한 나무판 가운데 적어도 여섯 점에 안트베르펜의 표시가 있고,
그림에 등장하는 은제 칼에서도 이 도시와 관련된 표식이 확인된다.
1635년 암스테르담의 한 문서에는 그녀를 안트베르펜 출신의 여성으로 지칭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당시 안트베르펜은 단순히 화가가 많은 도시가 아니었다.
16세기 중반 안트베르펜은 유럽을 대표하는 상업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1585년 스페인군의 안트베르펜 점령을 거치며
도시의 인구와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프라도 미술관에 따르면 한때
약 10만 명에 가까웠던 인구는 세기가 끝나기 전에 대략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1599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알베르트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가 통치하면서 남부 네덜란드는 다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페테르스가 화가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으면서도 상업과 예술품 시장이 다시 움직이던 도시였다.
이 환경은 정물화의 성장과 잘 맞아떨어졌다.
왜 하필 식탁 위의 물건을 그렸을까
17세기 플랑드르 정물화를 단순히 ‘먹을 것이 풍성해져서 생긴 그림’이라고 설명하면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사는 사람과 그림이 놓이는 공간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나 왕실만이 그림의 소비자가 아니었다.
도시의 부유한 시민과 상인, 수집가들도 회화를 구입했다.
그림은 제단이나 궁전의 공식 공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소유하고 감상하는 물건이 되어갔다.
안트베르펜은 그림을 제작하고 거래하며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프라도는 페테르스의 작품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발견되는 사실을 근거로
그녀가 미술상을 통해 작품을 유통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당시 안트베르펜의 회화 제작과 수출 체계 안에서 그녀의 정물화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물화는 새로운 미술 시장에 아주 잘 맞는 장르였다.
거대한 제단화처럼 특정 장소에 묶일 필요가 없다.
특정 인물의 초상처럼 주문자 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꽃과 값비싼 그릇, 진귀한 음식과 반짝이는 금속을 그린 그림이라면
다른 도시의 구매자에게도 매력적일 수 있었다.
그림이 하나의 상품으로 국경을 건너기 시작한 시대에 정물화는 상당히 유연한 장르였던 셈이다.
그림 속 식탁은 당시 세계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페테르스의 정물화가 한층 재미있어진다.
17세기 유럽의 식탁 위에는 유럽 안에서 만들어진 물건만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프라도가 소장한 페테르스의 다른 정물화에는
중국에서 제작되어 유럽으로 수출된 크라크 자기 접시가 등장한다.
프라도는 이런 중국 자기가 16세기 말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들어와 확산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런 정물화를 볼 때 단순히 “그릇을 정말 잘 그렸다”고 끝내면 조금 아쉽다.
식탁은 당시의 국제 교역과 소비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도자기, 유리잔, 금속공예품, 음식과 향신료가 서로 다른 생산지와 교역망을 거쳐
한 사람의 식탁에 도착한다. 화가는 그것들을 다시 그림 안에 모아놓는다.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물건을 그린 그림이지만,
그 물건들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의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넓었다.
플랑드르 바로크 한가운데서 태어난 정물화
미술사적으로 페테르스는 17세기 플랑드르 회화, 넓게는 바로크 시대에 속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그림을 보고 루벤스의 거대한 종교화처럼 격렬한 움직임부터 찾을 필요는 없다.
같은 시대의 미술이라도 장르에 따라 모습은 전혀 달라진다.
페테르스의 정물화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물의 물질감이다.
금속은 금속답게, 유리는 유리답게, 꽃은 꽃답게 보여야 한다.
빛이 닿았을 때 은과 주석이 어떻게 다르게 반짝이는지,
투명한 유리와 불투명한 도자기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
화가의 실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기에는 북유럽 회화의 오랜 전통도 이어져 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에서부터 화가들은 직물, 보석, 유리, 금속,
피부 같은 서로 다른 재질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구별해왔다.
17세기 정물화는 그 능력을 인간의 몸이나 성경 이야기에서 떼어내
사물 자체에 집중시킨 장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정물화는 단순한 모사가 아니다.
화가는 사물을 그리면서 동시에 자기 솜씨를 보여준다.
“이 은잔의 반짝임까지 그림으로 옮길 수 있다.”
“투명한 유리와 탁한 금속의 차이를 붓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정물화의 조용한 화면 안에는 화가의 기술을 과시하는 경쟁이 숨어 있다.
페테르스는 그 경쟁에서 상당히 독특한 방식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 화가는 여성이었다
여기에서 클라라 페테르스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그녀의 생애를 거의 모른다.
프라도 미술관도 페테르스에 관한 정보 대부분이 작품에서 나온다고 밝힌다.
출생지도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 프라도의 작가 정보는 대략 1588~1590년경 태어나 1621년 이후까지 활동한 것으로 제시한다.
현존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연도가 확인되는 그림은 1607년 작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안트베르펜 화가조합에서 그녀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정확히 어떤 공방에서 일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페테르스의 전기는 일반적인 유명 화가의 전기처럼 쓸 수가 없다.
태어나고, 스승을 만나고, 공방에 들어가고, 주문을 받고,
명성을 얻었다는 식의 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림이 기록을 대신한다.
현재 알려진 작품 가운데 39점에는 클라라 페테르스의 서명이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가운데 11점에는 제작연도가 적혀 있다.
기록이 부족한 화가에게 이 서명들은 단순한 사인이 아니다.
자신이 실제로 활동했던 화가였다는 흔적이다.
여성 화가에게 정물화는 어떤 장르였을까
17세기 초 여성이 전문 화가로 활동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미술 교육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던 인체 소묘,
특히 남성 누드를 직접 연구하는 기회가 여성에게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규모 역사화나 종교화를 제작하려면 공방 조직과 주문 네트워크도 필요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페테르스가 정물화에 집중한 배경에
당시 여성 화가에게 가해졌던 문화적 제약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그것을 수동적인 선택으로만 보지 않는다.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새로운 장르에 뛰어든 그녀의 진취적인 면도 함께 강조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여자라서 정물화밖에 그릴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녀의 그림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
제약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페테르스는 그 제약 안에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시장을 선택했고,
그 장르에서 자신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녀가 정물화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화가로 평가되는 이유다.
프라도 역시 페테르스를 정물화 분야의 선구자이자
근세 유럽에서 전문적으로 회화 활동을 한 드문 여성 화가 가운데 한 명으로 소개한다.
그림에 자기 자신을 숨겨 넣은 화가
페테르스의 작품에는 더 흥미로운 흔적이 있다.
자기 얼굴이다.
그녀는 일부 정물화의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 아주 작은 자신의 모습을 반사상으로 그려 넣었다.
이번 작품인 《꽃, 은도금 잔, 말린 과일과 과자가 있는 정물》에도 그런 자화상이 들어 있으며,
프라도는 이 작품을 페테르스가 금속 용기의 반사면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명시하고 있다.
정물화인데 화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화면 한가운데 커다란 자화상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건을 정밀하게 관찰해야 발견할 수 있는 작은 반사상 속에 들어가 있다.
그 의미를 하나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여성 화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묘한 울림이 생긴다.
그녀의 삶을 설명하는 문서는 사라졌는데, 그녀가 그린 은잔의 표면에는 그녀의 얼굴이 남아 있다.
안트베르펜의 그림이 어떻게 프라도에 왔을까
페테르스의 작품은 생전 또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부터 네덜란드 밖으로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1627년에는 로테르담의 한 소장품 기록에 그녀의 이름과 관련된 생선 그림이 등장하고,
1635년 암스테르담의 소장품에서도 작품이 기록된다.
1637년에는 마드리드의 레가네스 후작 디에고 멕시아의 컬렉션에도
페테르스의 작품 두 점이 있었다.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비교적 일찍 확인된다.
프라도가 현재 소장한 《매, 새, 도자기와 조개가 있는 정물》과
《생선, 촛불, 아티초크, 게와 새우가 있는 정물》은
1666년 마드리드의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기록된 두 작품과 동일한 그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이번에 보는 《꽃, 은도금 잔, 말린 과일과 과자가 있는 정물》은
1746년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서 처음 확실하게 기록된다.
당시 펠리페 5세의 왕비 이사벨 데 파르네시오의 소장품으로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있었고, 이후 왕실 컬렉션을 거쳐 프라도에 들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프라도의 페테르스 작품 네 점이 크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처음부터 하나의 연작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프라도는 작품들의 소장 이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네 점을 하나의 세트로 보는 기존 견해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기록은 희미하지만 그림은 남았다
클라라 페테르스의 삶에는 빈칸이 많다.
정확한 출생지도 확실하지 않다.
스승도 모른다. 결혼 여부도 확정할 수 없다.
죽은 연도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작품은 유럽 여러 지역에 남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자기 주변에서 몇 점의 그림을 그리다
사라진 이름 없는 화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소장품에 기록되고,
마드리드의 귀족 컬렉션과 스페인 왕실 컬렉션까지 들어갔다.
프라도는 이런 분포가 페테르스의 정물화가
당시 안트베르펜의 국제적인 회화 수출망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 먼저 기억할 것은 꽃의 이름이나 과자의 종류가 아니다.
1611년이라는 시간이다.
정물화가 아직 새로운 가능성을 넓혀가던 시절이었다.
국제무역을 통해 진귀한 물건들이 유럽의 식탁으로 들어오고,
도시의 새로운 미술 소비자들이 그림을 구입했으며,
안트베르펜에서는 회화가 다른 도시와 나라로 활발하게 팔려나갔다.
그 변화 속에서 한 여성 화가가 사람 대신 물건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유리와 은, 꽃과 과일, 빵과 포도주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클라라 페테르스의 생애를 전해주는 기록은 놀랄 만큼 적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정물화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어떤 작업실에서 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바라보았던 식탁은 남아 있다.
그리고 반짝이는 금속 표면을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던 화가 자신도 아주 작게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