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88편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그라나다의 항복》, 800년 역사의 마지막 문이 닫히던 날

프란시스코 프라디야의 《그라나다의 항복》을 통해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멸망과 이사벨·페르난도의 정복, 스페인 역사화의 탄생 배경을 살펴본다.

 

《광녀 후아나》를 그린 화가가 다시 선택한 스페인의 역사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여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후아나 1세.

우리는 앞서 프란시스코 프라디야가 그린 《광녀 후아나》를 통해 그녀의 삶을 살펴봤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왕실의 권력투쟁 속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잃어버린 여왕.

프라디야는 그 여왕의 비극을 거대한 역사화로 그려냈다.

1877년에 완성된 《광녀 후아나》는 이듬해 마드리드 국립미술전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프라디야는 스페인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화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유럽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녀 후아나》가 성공한 직후, 

프라디야에게 또 하나의 역사적인 작품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 여왕의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역사 전체를 바꾸어놓은 사건이었다.

바로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의 항복이었다.

그라나다는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가 항복하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왕국들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프라디야는 이 사건을 《그라나다의 항복》이라는 거대한 역사화로 완성했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작 《그라나다의 항복》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우리가 앞서 만났던 

후아나 여왕의 부모이기도 하다.

《광녀 후아나》가 그들의 딸이 겪은 비극을 보여준다면, 

《그라나다의 항복》은 그보다 앞선 시대에 부모가 이룬 정치적·군사적 승리를 다룬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사건을 그렸지만, 

스페인 왕실의 역사라는 하나의 긴 이야기 속에서 연결된다.

그렇다면 그라나다의 항복은 어떤 사건이었을까.

왜 스페인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토록 중요하게 기억했을까.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1492년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이슬람 세력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한 이베리아반도는 

오랫동안 여러 민족과 종교가 함께 살아온 지역이었다.

고대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뒤에는 서고트 왕국이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

그런데 711년, 이베리아반도의 역사를 크게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이슬람 군대가 서고트 왕국을 공격한 것이다.

이슬람 세력은 빠르게 세력을 확대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이 지역의 이슬람 통치 영역은 아랍어로 '알안달루스(Al-Andalus)'라고 불리게 되었다.

알안달루스는 단순히 군대가 점령한 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종교와 언어, 학문과 건축,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지역이었다.

특히 코르도바는 한때 서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시로 성장했다.

이슬람 통치 아래에서는 무슬림뿐 아니라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살아갔다.

물론 세 종교의 사람들이 언제나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대와 통치자에 따라 종교적 관용의 정도가 달랐고, 

비무슬림에게는 별도의 세금과 법적 제약이 적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오랫동안 접촉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오늘날 스페인 곳곳에 남아 있는 이슬람 건축과 지명, 

언어의 흔적은 바로 그 역사의 유산이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역시 이러한 문화 속에서 탄생했다.


기독교 왕국들의 영토 확대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뒤에도 

북부 산악 지역에는 기독교 세력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점차 여러 왕국으로 성장했고,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오늘날 흔히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린다.

우리말로는 보통 '국토회복운동' 또는 '재정복'이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 말은 약 8세기에 걸친 복잡한 역사를 

하나의 기독교 국가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과정처럼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오늘날과 같은 단일한 스페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비롯한 여러 기독교 왕국이 있었고, 

이슬람 세력 역시 시대에 따라 여러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독교 왕국끼리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종교가 다른 왕국들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레콩키스타는 단순히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종교가 일관되게 맞선 전쟁으로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안에는 왕국들의 영토 경쟁과 왕위 계승 문제, 경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베리아반도의 정치적 균형은 점차 기독교 왕국들 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13세기에는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남쪽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차지했다.

1236년에는 코르도바가, 1248년에는 세비야가 카스티야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한때 이베리아반도의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이슬람 세력은 

이제 남부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왕국이 바로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였다.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

그라나다 왕국은 1230년대에 성립한 이슬람 왕국이었다.

이 왕국을 통치한 나스르 왕조는 

오늘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했다.

그라나다는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중해와 가까운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무역과 농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이곳은 뛰어난 건축과 장식 예술로 유명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알람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왕국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왕실의 거주 공간이었다.

궁전의 정교한 장식과 정원, 물을 이용한 공간 구성은 

나스르 왕조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름다운 궁전이 존재한다고 해서 

왕국의 정치적 상황까지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라나다는 북쪽의 강력한 카스티야 왕국과 오랫동안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때로는 전쟁을 벌였고, 때로는 조약을 맺었다.

카스티야에 공물을 바치며 왕국의 존속을 보장받기도 했다.

이러한 외교적 관계와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갈등 덕분에 

그라나다는 다른 이슬람 왕국들이 사라진 뒤에도 250년 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에 이르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그라나다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졌고, 

북쪽에서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두 군주가 강력한 정치적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 두 군주가 바로 이사벨과 페르난도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왕국의 결합

1469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였던 이사벨과 아라곤 왕가의 페르난도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단순한 왕실의 혼인이 아니었다.

훗날 이베리아반도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사벨은 1474년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었고, 페르난도는 1479년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치하면서 공동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다만 두 왕국이 결혼과 동시에 하나의 통일 국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각자의 법률과 제도, 정치적 전통을 유지했다.

두 왕국의 결합은 오늘날 스페인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 통일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왕권을 강화하고 왕국 내부의 질서를 정비하는 한편, 

이베리아반도에 남아 있던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려 했다.

그라나다 정복은 영토를 확대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군주로서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이었다.

두 군주는 훗날 '가톨릭 군주들'이라는 칭호로 알려지게 된다.

이들의 통치에서 가톨릭 신앙은 단순한 개인의 종교가 아니었다.

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왕국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라나다를 정복하려는 계획 역시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목표와 연결되어 있었다.


1482년, 그라나다 전쟁이 시작되다

그라나다를 둘러싼 전쟁은 1482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약 10년에 걸쳐 도시와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고, 

그라나다 왕국의 저항 능력을 약화시키는 긴 과정이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당시 발전하고 있던 화포를 공성전에 활용했고, 

군대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성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방식은 그라나다 왕국의 방어 능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한편 그라나다 왕국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었다.

왕국의 마지막 군주로 알려진 보압딜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권력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의 정식 이름은 무함마드 12세였다.

보압딜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랍어 이름에서 유래한 스페인식 명칭이다.

그는 아버지 아불 하산 알리와 권력을 다투었고, 왕실 내부의 다른 세력과도 경쟁해야 했다.

1483년에는 기독교 군대와 싸우다가 포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석방되어 다시 왕위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그라나다 왕국은 이미 내부 분열과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독교 군주들은 이러한 분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보압딜과 다른 왕위 경쟁자들 사이의 갈등은 

그라나다가 공동의 적에 맞서 힘을 모으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 사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대는 그라나다 왕국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1487년에는 말라가가 함락되었고, 1489년에는 바사가 항복했다.

이제 그라나다 왕국에 남은 마지막 중심지는 수도 그라나다였다.


마지막 수도가 포위되다

1491년,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군대는 그라나다를 본격적으로 포위했다.

그라나다는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도시였지만, 주변의 주요 거점들을 잃은 상태였다.

외부에서 식량과 물자를 공급받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도시 안의 주민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보압딜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끝까지 저항한다면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항복을 선택하는 일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왕위를 포기하는 일이었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정치적 독립을 끝내는 일이었다.

결국 보압딜은 항복 협상에 나섰다.

1491년 11월, 그라나다의 항복 조건을 규정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흔히 '그라나다 항복 협정'이라고 불린다.

협정에는 그라나다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슬람 신앙과 종교적 관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와 종교 공동체의 권리,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여러 조건도 규정되었다.

이러한 조항은 그라나다의 항복이 단순한 군사적 패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복 이후 주민들의 처우를 둘러싼 협상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보압딜은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안전과 일정한 재산, 거주지 등을 보장받기로 했다.

그러나 협정에 명시된 권리들이 이후에도 계속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그라나다의 항복은 전쟁의 끝이었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불확실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가 항복하다

마침내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군대에 넘겨졌다.

그라나다의 마지막 군주 보압딜은 왕권을 상실했고, 기독교 군주들은 도시를 장악했다.

이 사건은 이베리아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독립 이슬람 왕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진입한 이후 약 78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물론 이 기간 내내 하나의 이슬람 왕국이 이베리아반도를 통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왕조가 등장하고 사라졌으며, 기독교 왕국들과의 관계도 끊임없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1492년의 그라나다 항복은 

이베리아반도의 정치적 역사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기독교 군주들의 입장에서 그라나다 정복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영토 확대의 완성이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이 승리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반면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에게는 자신들이 속했던 왕국이 사라지고 

새로운 통치자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건이었다.

그라나다의 항복을 이해할 때는 이 두 가지 시선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오랜 전쟁의 끝이었지만, 

패배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지막 왕 보압딜의 운명

보압딜은 그라나다를 넘겨준 뒤에도 한동안 이베리아반도에 머물렀다.

그는 항복 협정에 따라 그라나다 남쪽의 알푸하라스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1493년 보압딜은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가 이베리아반도에서 다시 왕국을 세우는 일은 없었다.

오늘날 보압딜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그가 그라나다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도시를 돌아보았다는 전설이다.

그는 산길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도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여자처럼 울며 슬퍼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일화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

후대의 문학과 역사 서술을 거치면서 

보압딜의 패배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로 널리 퍼진 것이다.

그라나다 인근에는 오늘날에도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장소가 있다.


무명의 화가가 그린 보압딜


보압딜이 마지막으로 그라나다를 바라보았다는 전설과 연결된 곳이다.

실제로 그가 그곳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다는 사실은 

그라나다의 상실이 후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왕이 자신의 도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장면.

그 안에는 한 왕조의 몰락과 한 시대의 종말이 함께 담겨 있다.


그라나다의 항복 이후에도 역사는 계속되었다

1492년 그라나다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이베리아반도의 종교적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항복 협정은 무슬림 주민들의 종교와 생활을 보호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통치 아래의 종교 정책은 점차 달라졌다.

1499년부터 그라나다에서는 강압적인 개종 정책과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반란도 발생했다.

1502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무슬림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왕국을 떠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과 그 후손들은 훗날 '모리스코'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종교적·사회적 압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세기 초에는 모리스코들을 스페인에서 추방하는 정책까지 시행되었다.

따라서 1492년의 그라나다 항복을 

모든 주민이 새로운 국가 안에서 평화롭게 통합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정복은 끝났지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은 이후에도 크게 흔들렸다.

한편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같은 해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유대인들에게 개종하거나 왕국을 떠나도록 하는 추방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의 카리브해 지역에 도착했다.

이 항해는 이후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라나다 정복과 유대인 추방, 콜럼버스의 항해.

이 세 사건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지만, 

모두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통치기에 이루어졌다.

1492년은 이베리아반도의 정치적 질서가 바뀌는 동시에 

스페인 왕실의 영향력이 대서양 너머로 확대되기 시작한 해였다.

그라나다의 항복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전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그림으로 그린 것은 19세기였다

여기서 다시 프란시스코 프라디야에게 돌아가 보자.

그라나다가 항복한 것은 1492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만나는 《그라나다의 항복》은 그로부터 390년이 지난 

1882년에 완성된 그림이다.

프라디야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15세기의 사건을 

19세기의 역사관과 미술적 감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사건을 그리게 되었을까.

그 출발점에는 앞서 살펴본 《광녀 후아나》의 성공이 있었다.

1878년 8월 17일, 스페인 상원 의장이었던 

바르사나야나 후작은 프라디야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라나다의 항복을 주제로 한 대형 역사화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상원 의사당의 회의실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되었다.

당시 상원은 스페인의 역사적 인물과 중요한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과 조각으로 건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의 항복 역시 그 계획의 일부였다.

상원 측은 이 작품을 스페인 통합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구상했다.

그들에게 1492년의 그라나다 정복은 단순히 과거의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스페인이 하나의 국가로 발전해 온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프라디야는 이러한 국가적 의미를 담은 그림을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스페인이 1492년을 다시 바라본 이유

프라디야가 활동하던 19세기의 스페인은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스페인은 한때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나폴레옹 전쟁과 국내의 정치적 갈등,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은 

스페인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왕정과 자유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도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에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다시 돌아보았다.

미술 역시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역사 속 중요한 사건을 거대한 화면에 재현하는 

역사화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들은 과거의 전쟁과 왕실의 사건, 유명한 인물들의 삶을 그림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역사적 사건을 눈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국가의 과거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프라디야의 《그라나다의 항복》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다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15세기의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오늘날과 같은 스페인 국민국가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 군주가 통치하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제도와 법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의 역사화는 그라나다의 항복을 스페인 통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재구성했다.

프라디야의 그림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19세기 스페인이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프라디야는 그라나다에서 그림을 준비했다

프라디야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그라나다를 직접 찾았다.

그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상상으로만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라나다의 풍경과 건축물을 조사하고, 

당시의 의복과 무기, 왕실에서 사용한 물건 등을 연구했다.

역사 기록도 참고했으며, 작품을 완성하기 전 여러 습작을 제작했다.

프라디야는 그림 속 역사적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자료를 조사하더라도 

1492년 1월 2일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가 그린 항복 의식의 세부 장면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긴 기록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장면이었다.

스페인 상원은 공식 작품 해설에서 

당시 기록에 이사벨 여왕이 열쇠를 전달하는 현장에 있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도 설명한다.

그럼에도 프라디야는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함께 등장시켰다.

이는 두 군주가 이룬 정치적 결합과 그라나다 정복의 의미를 한 장면 안에 담으려는 

역사화의 구상과 연결된다.

프라디야는 그라나다에서 시작한 그림을 로마에서 완성했다.

1882년 6월 13일, 그는 완성된 작품과 함께 편지를 스페인 상원에 보냈다.

그림은 스페인에서 큰 관심을 받았고, 

프라디야는 《광녀 후아나》에 이어 다시 한번 역사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스페인 상원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 처음 약속했던 제작비의 두 배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라나다의 항복》은 이후에도 여러 전시와 복제 이미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승리의 순간을 그린 그림, 그 뒤에 남겨진 역사

《그라나다의 항복》은 

오늘날에도 스페인 역사화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가로 5m가 훨씬 넘는 그림에  1492년 그라나다의 항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면에 등장하는 군주들의 이름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라나다가 어떤 왕국이었는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지, 

그리고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어떤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전쟁을 벌였는지를 함께 알아야 한다.

그라나다의 항복은 기독교 군주들에게는 오랜 전쟁의 승리였지만, 

보압딜과 그라나다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왕국이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약 390년 뒤 프라디야는 

이 사건을 스페인의 역사적 통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다시 그렸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그림에는 서로 다른 두 시대가 겹쳐져 있다.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이 마지막으로 항복했던 날.

그리고 1882년, 그 사건을 스페인의 역사적 기억으로 되살린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에서 프라디야는 

왕실의 권력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한 여왕의 비극을 그렸다.

이번 《그라나다의 항복》에서는 한 왕국의 마지막 순간과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시작을 그렸다.

두 작품 모두 스페인 왕실의 역사를 다루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한 작품은 왕좌에 이름을 올리고도 통치권을 잃어버린 여왕의 이야기다.

다른 한 작품은 자신의 왕국을 넘겨주고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던 마지막 군주의 이야기다.

그렇게 프라디야는 한 사람의 비극과 한 왕국의 몰락을 통해 

스페인의 역사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라나다의 항복》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의 항복은 과연 누구에게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고, 

누구에게는 오래된 세계의 끝이었을까.

그 질문을 품고 그림을 바라볼 때, 

화려한 왕실의 의식 너머에 놓인 수백 년의 역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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