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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작 《사랑의 정원》 |
74편에 이어 다시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 앞에 서보자.
이번에는 그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루벤스의 생애나 재혼 이야기,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도 잠시 내려놓는다. 이제부터 볼 것은 오직 화면 안이다.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먼저 ‘사람이 많다’는 느낌이 든다.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앉거나 서 있고, 머리 위에는 날개 달린 아이들이 날아다닌다.
오른쪽에는 건축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풍경이 열린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이 복잡한 장면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의 얼굴에서 손으로, 손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날아다니는 아이와 조각상으로 시선이 이어진다.
《사랑의 정원》은 사랑을 설명하는 그림이라기보다
사랑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에 가깝다.
먼저 가운데 사람들부터 보자
화면의 중심부에는 여러 남녀가 가까이 모여 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영웅처럼 압도적으로 크거나
특별히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
이 그림에는 《파리스의 심판》의 파리스처럼 사건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없다.
대신 여러 사람이 관계를 만든다.
앉아 있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 서로에게 몸을 기울이는 사람,
옆을 바라보는 사람, 대화를 나누는 듯한 사람이 한데 얽혀 있다.
그래서 눈은 한 사람에게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특히 화면 중앙에서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앉아
위를 바라보는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머리는 거의 화면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보자.
그곳에는 날개 달린 아이가 떠 있다.
손에는 불타는 횃불과 꽃으로 만든 관이 들려 있다.
프라도는 이 두 물건을 근거로 이 존재를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Hymen)로 설명한다.
사랑의 정원 한가운데에 단순한 연애뿐 아니라 결혼과 결합이라는 의미가 들어오는 지점이다.
중앙의 여성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간다.
루벤스가 화면 한가운데에 커다란 상징물을 놓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시선 하나를 이용해 관람자의 눈을 상징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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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정원 중앙 인물들 |
파란 옷의 여인에게 눈이 간다
이제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을 보자.
화려한 푸른색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의 옷은 주변의 갈색과 녹색,
금빛이 섞인 색들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살아난다.
두꺼운 천은 몸을 감싸면서도 곳곳에서 접히고,
빛을 받은 부분과 그림자 속 부분이 빠르게 바뀐다.
루벤스는 옷을 단순히 인물을 덮는 천으로 그리지 않는다.
천 자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만든다.
푸른색은 이 여성을 화면 속에서 쉽게 찾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주변 인물들의 몸과 옷이 겹쳐 있어도 그녀의 존재는 묻히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도 눈여겨볼 만하다.
둥근 얼굴, 비교적 작은 입, 부드러운 턱선이 보인다.
이 여성은 루벤스의 아내 헬레나 푸르망의 얼굴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선을 하나 그어야 한다.
그림 속 여성이 곧 헬레나의 초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프라도 역시 닮은 모습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도,
이것이 루벤스 자신의 삶을 직접 등장시킨 것인지 아니면
아내에게서 얻은 여성 유형을 사용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이 차이를 알고 보면 그림이 더 재미있어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 인물과 이상적인 사랑의 세계 사이에 있는 얼굴이다.
손을 따라가면 관계가 보인다
《사랑의 정원》에서는 얼굴만큼 손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한 사람의 손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누군가는 상대에게 다가가고,
누군가는 몸을 기울인다.
특히 앞쪽 여성과 푸른 옷의 여성 사이를 보자.
앞쪽에 앉아 있는 여성은 푸른 옷의 여성에게 자리를 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까이에 있는 사랑의 신을 만져보라고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라도 역시 이 몸짓을 두 가지 가능성으로 열어둔다.
이런 부분에서는 정확한 대사를 만들어내지 않는 편이 좋다.
루벤스가 그린 것은 대화문이 아니라 몸짓이다.
그 손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생긴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이 그림 전체가 그렇다.
인물들은 정면을 보고 줄지어 서 있지 않는다.
몸을 돌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면서 서로 연결된다.
사랑이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몸과 몸 사이의 거리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보자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면 그림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진다.
현실적인 옷을 입은 남녀 위로 벌거벗은 날개 달린 아이들이 날아다닌다.
이들은 모두 똑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프라도의 설명처럼 루벤스는 어떤 아이에게는 새의 날개를,
다른 아이에게는 곤충을 연상시키는 날개를 붙였다.
고대 미술에서 볼 수 있었던 차이를 활용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현실과 신화의 경계가 무너진다.
아래에 있는 남녀는 루벤스 시대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그 머리 위를 사랑의 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다닌다.
마치 이 정원에서는 사랑의 신을 보는 것이 특별한 사건도 아닌 것 같다.
이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루벤스는 현실 세계 한쪽에 신화의 장면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인간과 신화적 존재를 같은 공기 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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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신들과 비둘기 |
비둘기를 붙잡은 붉은 끈
날아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자세히 보면 붉은 끈이 눈에 들어온다.
그 끈에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연결되어 있다.
비둘기는 오래전부터 비너스와 관계된 동물이었다.
두 마리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모습 때문에
이 장면은 사랑과 결합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프라도 역시 이를 사랑과 결합의 개념이 결합된 이미지로 해석한다.
여기서 루벤스의 상징 사용법이 보인다.
그는 화면 가운데에 커다란 글씨로 ‘사랑’이라고 쓰지 않는다.
대신 두 마리의 새와 가느다란 붉은 끈을 그린다.
멀리서 볼 때는 거의 지나쳐버릴 정도로 작은 요소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화면 전체의 의미가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한다.
오른쪽 위, 정원을 지켜보는 비너스
이제 오른쪽 건축물 쪽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그곳에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조각상이 자리한다.
중요한 것은 비너스가 살아 있는 인물로 남녀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존재감은 강하다.
비너스는 정원 전체를 내려다보며 이 장소의 성격을 알려주는 표지처럼 기능한다.
이곳이 단순히 귀족 남녀가 모인 야외 파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비너스 주변에는 공작도 보인다.
공작은 일반적으로 유노의 속성으로 알려진 동물이다.
프라도는 이 공작이 유노와 그녀에게 연결되는 모성의 의미를 불러오면서,
이 그림의 사랑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더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니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유혹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결혼과 결합, 그리고 그 이후의 삶까지 은근하게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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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너스 조각상과 건축물 |
더 안쪽에는 삼미신이 있다
건축물 안쪽에도 조각상이 하나 더 있다.
삼미신이다.
비너스와 자주 함께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림 속에 두 종류의 신화적 존재가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비너스와 삼미신은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반면 사랑의 신들은 살아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날아다닌다.
돌과 살.
정지와 움직임.
신화가 조각의 형태로 정원에 머무르는 동시에,
그 신화에서 나온 사랑의 힘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인간들 사이로 뛰어든다.
그 때문에 정원 전체가 조금씩 현실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완전히 환상 세계가 되지도 않는다.
이 애매한 경계가 《사랑의 정원》의 묘한 매력이다.
아래로 내려오면 음악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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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트를 연주하는 인물들 |
다시 화면 가운데 아래쪽으로 눈을 내리자.
중앙에서 조금 왼쪽을 자세히 보자.
노란 옷을 입은 여성 뒤쪽으로 한 남자의 옆얼굴이 보인다.
이 남자가 류트 연주자다. 하지만 처음 그림을 보면 악기를 찾기가 쉽지 않다.
류트의 둥근 몸통은 주변 인물들에게 거의 가려지고,
목 끝과 뒤로 꺾인 줄감개 부분 정도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노래하는 듯한 녹색 옷의 여성과 악보를 든 아이도 있다.
눈으로 보는 그림 속에 음악이라는 또 하나의 감각이 들어오는 부분이다.
프라도의 악기 조사 자료에서는 화면에서 악기의 몸통 전체가 아니라
목 끝과 뒤로 꺾인 줄감개 부분이 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열두 개의 줄감개가 있어 당시 일반적인 여섯 쌍의 현을 가진 류트였음을 알 수 있다.
옆에는 녹색 옷을 입은 여성이 있고, 노래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가까이에는 악보를 들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림에서는 실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루벤스는 악기와 노래하는 듯한 입, 악보를 함께 놓아
관람자가 음악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그림을 눈으로만 보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부족하다.
비단과 새틴 같은 옷감의 촉감이 있고, 물의 움직임이 있고,
음악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다.
정원은 여러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 공간이 된다.
뒤쪽 사람들은 조금 더 대담하다
이제 전경의 인물들 너머, 오른쪽 건축물 아래쪽을 자세히 보자.
앞쪽 인물들의 분위기보다 훨씬 장난스럽고 관능적인 장면이 숨어 있다.
한 남성이 여성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다.
동시에 다른 여성을 물줄기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모자를 들어 올린다.
멀리서 보면 거의 지나치기 쉬운 장면이다.
흥미롭게도 루벤스의 그림을 바탕으로
크리스토펠 예허가 만든 판화에서는 여성의 가슴에 닿았던 손의 위치가 조금 아래로 옮겨졌다.
프라도는 이를 언급하며 루벤스가 당시의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 표현에서 덜 조심스러웠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사랑의 정원》이 경건하고 추상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그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육체적인 끌림과 장난, 유혹도 들어 있다.
루벤스에게 사랑의 세계는 깨끗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친밀함과 결혼, 관능과 욕망이 같은 정원 안에서 공존한다.
오른쪽은 닫히고 왼쪽은 열린다
사람들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공간 전체를 보자.
오른쪽은 건축물이 화면을 잡는다.
기둥과 아치, 조각이 있는 구조물이 공간에 단단한 틀을 만든다.
반대로 왼쪽은 열린다.
나무 사이로 멀리 풍경과 하늘이 이어진다.
프라도 역시 화면 왼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루벤스의 뛰어난 풍경 표현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짚는다.
이 대비 덕분에 화면은 답답해지지 않는다.
오른쪽에는 사람이 밀집하고 건축물이 서 있지만, 왼쪽으로 빠져나갈 공간이 있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얼굴과 화려한 옷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왼쪽 풍경으로 빠져나가 잠시 쉬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밝은 인물들에게 돌아온다.
빛은 누구 하나만 선택하지 않는다
이 그림의 빛도 눈여겨볼 만하다.
종교화처럼 한 인물에게 강렬한 빛이 쏟아져
‘이 사람이 주인공이다’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따뜻한 빛이 여러 인물과 옷, 나무와 건축물 사이로 퍼진다.
빛을 받은 옷은 반짝이고, 피부는 부드럽게 살아난다.
그러다가 몸이 겹치는 곳에서는 곧바로 깊은 그림자가 생긴다.
프라도가 이 작품에서 따뜻한 빛과 화려한 의복,
부드러운 표정과 몸짓을 함께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옷을 보자.
푸른색, 녹색, 붉은색과 금빛에 가까운 따뜻한 색들이 한곳에 모인다.
색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따뜻한 공기 안에서 섞인다.
루벤스가 사람들의 행복을 얼굴 표정만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색 자체가 즐거움을 만든다.
이 그림에서는 눈이 계속 움직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보자.
이제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
가운데 녹색 옷의 여성에게서 위쪽 히메나이오스로 올라가고,
푸른 옷의 여성에게 옮겨간다.
그다음 손과 몸짓을 따라 주변 사람들을 본다.
머리 위의 사랑의 신들을 발견하고, 붉은 끈에 묶인 비둘기를 찾는다.
오른쪽으로 가면 비너스와 공작이 있고, 건축물 안쪽에는 삼미신이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류트와 악보가 보이고,
뒤쪽에는 좀 더 대담한 연애의 장면이 숨어 있다.
마지막으로 왼쪽의 풍경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사랑의 정원》을 보는 좋은 방법이다.
한 명의 주인공을 찾지 않는 것이다.
누가 누구인지 전부 이름 붙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보면 된다.
시선이 있고 손이 있다.
음악이 있고 물이 있다.
비둘기가 있고 꽃이 있다.
비너스가 있고 사랑의 신들이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에 따뜻한 빛과 풍부한 색이 흐른다.
루벤스는 사랑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로 좁히지 않았다.
누군가는 바라보고, 누군가는 손을 내민다.
누군가는 연주하고, 누군가는 노래하며, 누군가는 유혹하고,
사랑의 신들은 그 사이를 날아다닌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사랑의 정원》이라는 사실이 마지막에 다시 와닿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라고 번지고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정원 전체를 그린 그림이다.
프라도에서 이 작품 앞에 서게 된다면 처음부터 세부를 찾지 말고 먼저 전체를 보자.
그다음 가운데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눈과 손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 된다.
그러면 처음에는 화려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그림 안에서,
루벤스가 숨겨놓은 수많은 관계가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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