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83편 후안 산체스 코탄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세부 감상, 검은 공간에 매달린 과일과 새들

후안 산체스 코탄의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을 세밀하게 감상한다. 검은 벽감에 매달린 레몬과 사과, 새들부터 돌턱의 당근과 무, 커다란 카르둔까지 빛과 구도를 따라 살펴본다.

 

후안 산체스 코탄,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1602년, 캔버스에 유채, 68 × 88.2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후안 산체스 코탄 작《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그림 앞에 서면 먼저 검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레몬과 사과가 매달려 있고, 새들이 아래로 늘어져 있다. 

맨 아래에는 당근과 무가 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커다란 흰 채소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식탁 위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매달린 것과 아래에 놓인 것이 서로 다른 높이에 머물러 있다. 

검은 배경 때문에 그 사이의 거리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조금 뒤로 물러서서 보면 공간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림 가장자리의 회색 돌틀과 아래쪽의 넓은 턱이 어두운 벽감을 감싸고 있다. 

신선한 식재료를 보관하는 찬장 같은 공간이다.

이제 왼쪽 위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검은 공간의 첫 번째 빛, 레몬


화면 왼쪽 세부. 검은 공간에 매달린 레몬과 작은 새들, 비스듬히 놓인 막대가 보인다.
매달린 레몬

화면 왼쪽 위에는 노란 레몬 세 개가 잎이 달린 가지와 함께 매달려 있다.

가장 위의 레몬은 옆으로 길게 놓였고, 

그 아래의 두 개는 둥근 몸체를 앞쪽으로 내밀고 있다. 

같은 과일인데도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빛이 닿는 면과 어두워지는 면도 조금씩 달라진다.

레몬의 표면은 매끈한 공처럼 처리되지 않았다. 

껍질에는 작은 굴곡이 있고, 끝부분은 뾰족하게 솟아 있다. 

밝은 노란색 한 가지로 칠한 것도 아니다. 

빛을 받는 부분은 연하고 따뜻하며, 아래쪽과 옆면에는 짙은 노란색과 갈색 기운이 섞여 있다.

레몬 사이로 뻗은 잎도 함께 보자. 

잎은 과일보다 어둡지만 검은 배경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는다. 

잎맥과 가장자리의 밝기를 조금씩 달리해 얇고 넓은 형태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레몬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위쪽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다. 

화가는 줄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늘게 그려서 과일의 밝은 몸체가 먼저 눈에 들어오게 했다.

레몬 아래에는 넓은 검은 공간이 남아 있다. 

그 덕분에 노란색은 주변의 다른 색과 섞이지 않고 또렷하게 떠오른다.


왼쪽 아래, 비스듬히 기댄 막대와 작은 새들

레몬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왼쪽 가장자리에 긴 막대가 보인다. 

막대는 수직으로 서 있지 않고 위쪽이 왼편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뒤로 작은 새 여섯 마리가 한데 묶여 있다. 

새들은 각자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이 아니다. 

몸이 아래로 처져 있고, 서로 겹친 채 막대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 보면 새들의 몸은 하나의 갈색 덩어리가 아니다. 

밝은 배와 어두운 등, 작은 날개와 꼬리가 겹쳐져 있다. 

같은 방향으로 놓인 듯하다가도 부리와 

몸통의 각도가 조금씩 달라서 각각의 새를 구분할 수 있다.

막대는 이 새들의 묶음 앞을 비스듬히 지나간다. 

화면 가장자리와 평행하지 않은 긴 선 하나가 생기면서, 

왼쪽 아래의 정적인 공간에 방향이 만들어진다.

그 선을 눈으로 따라 내려가면 막대의 끝이 돌턱 가까이에 닿는다. 

새들은 어두운 안쪽에 있고 막대는 밝은 앞쪽으로 뻗어 있다. 

두 대상이 겹치는 방식만으로도 앞과 뒤의 차이가 생긴다.

작은 새들의 발이나 깃털을 하나씩 알아보려고 그림에 바짝 다가갈 필요는 없다. 

먼저 여섯 마리가 모여 만든 어두운 묶음을 보고, 

그다음 밝게 드러나는 배와 날개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면 된다.


사과는 왜 한 덩어리로 모여 있을까


면 중앙 세부. 한데 모여 매달린 사과와 크기가 다른 새들이 어두운 공간에 놓여 있다.
매달린 사과

왼쪽 아래의 작은 새들에서 시선을 오른쪽 위로 옮기면 사과들이 보인다. 

레몬과 달리 사과는 여러 개가 한데 모여 아래로 매달려 있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줄들은 사과 가까이에서 서로 벌어진다. 

줄이 만드는 삼각형 아래에 둥근 사과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사과의 색을 살펴보자. 모두 똑같이 붉지 않다. 

어떤 것은 연한 노란색이 넓게 남아 있고, 어떤 것은 붉은빛이 한쪽 면에 집중되어 있다. 

붉은 부분에도 밝고 어두운 차이가 있어서 과일의 둥근 형태가 드러난다.

사과들은 서로 맞닿거나 겹쳐 있다. 

앞쪽 사과의 둥근 윤곽이 뒤쪽 사과의 일부를 가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릇이나 탁자가 없어도 이 과일들이 한 공간 안에 모여 있다고 느낀다.

사과 묶음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면 부드러운 곡선이 반복된다. 

위에서 내려오는 팽팽한 직선과 그 아래의 둥근 형태가 대비를 이룬다.

레몬이 각각의 몸체를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낸다면, 

사과는 서로 붙어 있는 관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과일 무리는 모두 매달려 있지만 화면 안에서 차지하는 모양은 전혀 다르다.


중앙에 매달린 새들, 서로 다른 크기와 무게

사과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검은 공간 위쪽에 작은 새 두 마리가 따로 매달려 있다. 

그 옆에는 몸집이 훨씬 큰 자고새 두 마리가 아래로 늘어져 있다.

작은 새들은 가느다란 몸통과 짧은 날개가 먼저 보인다. 

몸집이 작아 주변의 검은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진다.

자고새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화면의 무게가 달라진다. 

두 마리의 몸은 길게 내려오고, 날개와 깃털이 겹친 부분에는 밝은 갈색과 짙은 회색, 

검은색이 섞여 있다.

특히 앞쪽으로 보이는 자고새의 몸통에는 빛을 받은 깃털과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함께 있다. 

밝은 깃털을 따라가다 보면 날개의 경계가 드러나고, 

그 아래로 몸이 점점 가늘어지며 내려간다.

이 새들이 매달린 줄은 위쪽 돌틀에서 시작된다. 

새의 무게를 떠받치는 줄은 곧고 가늘다. 

반면 새들의 몸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같은 수직 방향이지만 하나는 팽팽하고 다른 하나는 무겁다.

자고새 아래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검은 공간이 있다. 

새들이 돌턱 위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빈자리에서 더 분명해진다.

화면을 처음 볼 때는 새들이 한가운데 모여 있다는 인상만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새와 큰 새의 크기, 매달린 높이, 몸이 향한 방향이 서로 다르다. 

화가는 비슷한 대상들을 한 줄로 나열하지 않고 각각 다른 간격을 두었다.


아래쪽 돌턱, 당근과 무가 만드는 긴 선


화면 아래쪽 세부. 돌턱 위에 놓인 당근과 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다.
돌턱에 놓인 당근과 무

이제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자.

돌턱에는 뿌리채소들이 가로로 놓여 있다. 

갈색과 노란빛이 도는 당근, 밝은 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다. 

위에서 매달린 과일과 새들이 수직선을 만들었다면, 

아래쪽의 채소들은 길게 누운 선으로 화면을 받쳐준다.

왼쪽 당근은 굵은 몸체가 돌턱 앞쪽으로 향한다. 

둥근 끝부분에는 빛이 닿고, 몸통을 따라가면 어두운 갈색과 밝은 부분이 번갈아 나타난다. 

표면은 유리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흙에서 꺼낸 뿌리채소 특유의 거칠고 단단한 느낌이 남아 있다.

그 옆의 길고 밝은 당근은 오른쪽으로 뻗는다. 

굵은 부분에서 가느다란 끝으로 이어지는 모양을 따라가면 시선도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무는 당근보다 색이 옅다. 

밝은 몸통에 연한 보랏빛과 회색 그림자가 섞여 있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져 돌턱의 앞쪽 아래로 길게 내려온다.

이 부분을 볼 때는 채소의 이름보다 끝이 향하는 방향을 먼저 따라가도 좋다. 

어떤 것은 화면 안쪽으로 누워 있고, 어떤 것은 돌턱 밖으로 튀어나온다. 

돌턱의 앞선을 기준으로 채소들이 조금씩 다른 깊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턱 아래쪽의 회색 면에도 시선을 줘보자. 

채소가 놓인 윗면은 빛을 받아 밝지만, 그 아래의 앞면은 상대적으로 어둡다. 

이 명암 차이 때문에 돌턱은 얇은 선이 아니라 두께를 가진 돌처럼 느껴진다.


오른쪽의 거대한 흰 채소


화면 오른쪽 세부. 커다란 카르둔의 밝은 줄기들이 검은 배경 앞에서 위로 휘어 올라간다.
검은 배경 앞의 커다란 카르둔

그림에서 가장 넓고 밝은 면은 오른쪽에 있다.

커다란 카르둔이 돌턱 위에 놓여 있다. 

카르둔은 잎자루를 먹는 엉겅퀴류 채소로, 

이 그림에서는 길고 두꺼운 줄기들이 한데 모여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의 굵은 밑동에서 시작한 줄기들은 오른쪽 위로 크게 휘어 올라간다. 

그래서 카르둔은 다른 채소처럼 돌턱을 따라 누워 있지 않다. 

화면 오른쪽에 커다란 곡선을 세우며 검은 공간을 가로지른다.

멀리서 보면 거의 흰색 덩어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줄기마다 밝기가 다르다. 

빛을 직접 받는 면은 희고, 줄기 사이의 좁은 틈에는 회색 그림자가 들어 있다.

길게 뻗은 줄기들을 눈으로 따라가 보자. 

서로 나란히 올라가다가 끝부분에서 조금씩 벌어진다. 

잘린 끝은 매끈한 하나의 면이 아니라 줄기마다 높이와 각도가 다르다.

밑동에는 연한 노란색과 갈색이 섞여 있다. 

그 부분에서 줄기들이 모였다가 위쪽으로 펼쳐지는 구조가 드러난다.

카르둔은 오른쪽 돌틀 가까이까지 올라간다. 

돌틀의 곧은 선 옆에 채소의 긴 곡선이 놓이면서 두 형태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왼쪽의 레몬과 사과는 작은 둥근 형태들이다. 

중앙의 새들은 아래로 길게 늘어진다. 

오른쪽 카르둔은 그 모든 형태와 다르게, 넓은 면을 만들며 위로 솟는다.

화면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도 시선이 이 흰 채소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다.


검은 배경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일까

이제 개별 사물에서 눈을 떼고 검은 공간 자체를 보자.

배경에는 방의 벽지나 가구, 창밖 풍경이 그려져 있지 않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공간인지도 알 수 없다. 사물의 뒤쪽이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고 검은색이 모든 깊이를 없애지는 않는다.

위에서 내려오는 줄, 서로 겹친 사과, 돌턱 앞쪽으로 뻗은 무가 각각 다른 위치를 알려준다.

 화가는 멀리 있는 풍경을 그리지 않고도 

사물 사이의 겹침과 돌턱의 두께만으로 공간을 만든다.

밝은 물체 옆에서는 검은 배경이 더 짙게 느껴진다. 

특히 노란 레몬과 흰 카르둔 주변이 그렇다. 

반대로 어두운 깃털은 배경과 가까운 색을 띠기 때문에, 

빛이 닿는 부분과 윤곽을 따라가야 형태가 드러난다.

이 그림의 빛은 모든 사물을 똑같이 밝히지 않는다. 

레몬 껍질의 둥근 면, 사과의 앞쪽, 새의 깃털, 

카르둔의 긴 줄기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시선을 옮길 때마다 

같은 빛이 서로 다른 표면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볼 수 있다.


돌틀 밖으로 나오는 것들

마지막으로 화면의 경계를 살펴보자.

검은 공간을 감싼 돌틀은 사물들을 안쪽에 가두는 액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래쪽의 당근과 무는 그 경계를 향해 뻗고, 일부는 돌턱의 앞선을 넘어선다.

특히 가늘게 내려오는 무의 끝을 따라가면 

그림 안의 물체가 우리 쪽 공간으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면 위에서 매달린 과일과 새들은 돌틀 안쪽의 어둠에 머문다. 

앞쪽으로 뻗은 채소와 안쪽에 매달린 사물들이 함께 있어, 

얕아 보이던 찬장에 깊이가 생긴다.

돌턱 앞면의 가운데 아래에는 화가의 서명과 제작연도가 작게 적혀 있다. 

그림의 주인공처럼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다. 

사물들을 모두 둘러본 뒤 아래쪽을 살펴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다시 그림 전체를 보자.

왼쪽 위의 레몬에서 시작한 시선은 

사과와 매달린 새들을 지나 오른쪽의 흰 카르둔으로 향한다. 

거기서 긴 줄기의 곡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돌턱의 당근과 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뿌리채소들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새들이 매달린 막대와 다시 만난다.

그림 안의 사물들은 서로 닿아 있기도 하고 넓은 어둠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기도 하다. 

그 간격을 따라 눈을 움직이다 보면 처음에는 텅 비어 보였던 검은 공간이 조금씩 달라진다.

산체스 코탄은 과일과 새, 채소를 그렸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물건의 모양만이 아니다. 

매달린 것과 놓인 것, 둥근 것과 길게 뻗은 것, 

밝은 표면과 어두운 깃털이 서로의 모습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그림 앞에서 마지막으로 카르둔의 흰 줄기와 그 옆의 검은 공간을 번갈아 바라보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듯한 어둠이야말로 

이 평범한 식재료들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자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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