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77편 벨라스케스 《실 잣는 여인들―아라크네의 우화》 세부 감상, 돌아가는 물레 너머에서 신화가 시작된다

프라도 명작산책 77편.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아라크네의 우화》를 화면 속으로 들어가 세밀하게 감상한다.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와 일하는 여인들, 빛나는 후경의 미네르바와 아라크네, 태피스트리 속 신화까지 벨라스케스가 만든 시선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실 잣는 여인들―아라크네의 우화》. 어두운 전경의 직조 작업과 밝은 후경의 신화 장면을 하나의 깊은 공간 안에 겹쳐 놓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 《실 잣는 여인들―아라크네의 우화》

《실 잣는 여인들》 앞에 서면 처음부터 아라크네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벨라스케스는 신화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눈앞에는 어두운 작업장이 있고, 그 안에서 여인들이 실을 만들고 있다. 

신화는 그보다 훨씬 뒤쪽, 밝은 공간으로 물러나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앞에서 뒤로 들어가며 봐야 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노동에서 이미지로, 현실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신화의 공간으로 시선을 옮겨가면 그림의 구조가 조금씩 풀린다.


먼저 눈앞의 다섯 여인을 본다

화면 아래쪽을 넓게 차지한 공간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있다.

누구도 관람자를 바라보지 않는다.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해 있다. 누군가는 실을 다루고, 누군가는 몸을 숙이고, 

또 다른 여인은 옆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화화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벨라스케스는 이들을 이상적인 신화 속 인물처럼 꾸미지 않았다. 

화려한 궁정의 옷도 입히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실제 작업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했다.

여인들의 몸도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다.

앉은 사람과 선 사람이 섞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사람과 옆으로 돌린 사람이 이어진다. 

이 서로 다른 자세 때문에 화면 앞부분에는 계속 움직이는 듯한 리듬이 생긴다.

정지된 다섯 사람을 그렸는데도 조용하지 않다.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한순간을 붙잡은 것처럼 느껴진다.


왼쪽의 물레부터 보면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와 실을 다루는 여인. 물레의 바퀴살을 또렷하게 고정하지 않은 붓질이 실제로 회전하는 듯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물레와 실을 다루는 여인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왼쪽의 커다란 물레다.

그런데 물레의 살이 또렷하지 않다.

빠르게 돌아가는 바퀴를 사진으로 찍었을 때처럼 형태가 흐려져 있다. 

중심과 테두리는 어느 정도 느껴지지만 바퀴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세기는 어렵다.

이 부분은 벨라스케스 후기 회화의 놀라운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움직이는 물레를 선으로 하나씩 설명하지 않는다. 

몇 번의 빠른 붓질과 흐릿한 흔적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가까이에서 보면 물감이다.

조금 떨어지면 바퀴가 돈다.

눈이 그림을 완성하는 셈이다.

물레 옆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다. 

머리에는 흰 천을 두르고 있으며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손은 실을 다루는 작업에 연결되어 있다.

얼굴보다 먼저 손과 팔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 여인을 초상화의 주인공처럼 세우지 않고 작업 과정 속에 묶어놓았다.

특히 눈여겨볼 곳은 옷이다.

흰색과 어두운 색이 강하게 대비하지만 천의 모든 주름을 정교하게 그려 넣지는 않았다. 

필요한 곳에만 밝은 붓질을 얹어 옷의 부피를 만들어낸다.

얼굴도 마찬가지다.

코, 눈, 입을 또렷한 윤곽선으로 둘러싸지 않았는데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표정과 머리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살아난다.


오른쪽의 여인은 등을 보인다


등을 보이고 앉은 젊은 여인의 흰 블라우스가 어두운 작업장 속에서 크게 밝아진다. 걷어 올린 소매와 굽힌 팔, 몸의 방향이 화면에 움직임을 더한다.
흰옷을 입고 등을 보인 여인

이제 시선을 화면 오른쪽으로 옮겨보자.

밝은 흰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다.

이 인물은 그림 앞쪽에서 상당히 큰 면적을 차지한다. 그런데 얼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목에서 어깨로 내려오는 선, 걷어 올린 소매, 굽힌 팔과 허리의 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벨라스케스가 흰색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볼 수 있다.

블라우스 전체가 똑같이 희지 않다.

빛을 직접 받는 곳은 밝지만 접힌 곳에는 회색과 갈색 기운이 섞인다. 

몇 가지 밝기의 차이만으로 얇은 천이 접히고 구겨진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흰색은 단순히 옷을 표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두운 작업장 속에서 이 넓은 밝은 면이 시선을 붙잡는다. 

왼쪽의 밝은 머릿수건과 오른쪽의 흰 블라우스가 서로 대응하면서 

화면 앞부분의 균형을 잡는다.

그 사이에 여러 여인의 얼굴과 팔이 놓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서 다음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노동의 공간이 더 선명해진다

그림의 아래쪽은 화려하지 않다.

사람들의 발과 작업에 필요한 물건들이 어두운 바닥 가까이에 놓여 있다. 

화면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 낮은 영역이 앞쪽 공간을 실제 작업장처럼 느끼게 한다.

특히 오른쪽 여인의 다리는 자세히 볼 만하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와 발이 빠르고 간결한 붓질로 처리되어 있다. 

해부학 교본처럼 형태를 선명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자세가 정확하게 읽힌다.

이런 부분에서 벨라스케스의 후기 붓질이 가진 특징이 드러난다. 

세부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한가운데에 벽이 있다




이제 앞쪽 인물들만 보던 시선을 조금 위로 들어보자.

여기서 그림이 갑자기 이상해진다.

작업장 뒤에 또 하나의 공간이 나타난다.

두 공간 사이에는 벽과 계단 같은 높이 차이가 있고, 뒤쪽은 앞쪽보다 훨씬 밝다. 

마치 작은 무대가 작업장 뒤에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계가 아주 중요하다.

앞쪽의 여인들은 우리와 가까운 어둠 속에 있다.

뒤쪽의 인물들은 밝은 빛 속에 있다.

벨라스케스는 단순히 사람을 앞뒤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으로 두 공간의 성격을 갈라놓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처음에는 앞쪽만 보다가 어느 순간 뒤쪽의 밝은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숨어 있었던 것 같은 순간이다.


계단을 올라가듯 뒤쪽으로 들어간다

앞쪽에서 뒤쪽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공간적인 장치도 있다.

바닥의 방향과 인물들의 겹침, 중간의 어두운 경계, 뒤쪽의 높아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래서 뒤쪽 장면은 실제 거리보다 훨씬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공간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앞쪽에서 이루어지는 직조 노동과 뒤쪽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실을 다룬다.

뒤에서는 그 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눈은 공간을 따라 뒤로 이동하지만 의미는 다시 앞으로 돌아온다.


뒤쪽에는 또 다른 여성들이 나타난다


어두운 작업장 너머로 한층 밝은 공간이 열린다. 벨라스케스는 앞쪽의 노동 장면과 뒤쪽의 신화적 장면을 빛과 공간의 깊이로 구분했다.
직조 작업장 뒤의 밝은 후경


밝은 후경에는 앞쪽과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 서 있다.

앞의 여성들이 노동하는 사람이라면, 뒤쪽의 인물들은 훨씬 더 무대 위의 인물처럼 보인다. 

의상의 색도 강해지고 자세도 극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사람과 뒤에 걸린 태피스트리의 이미지가 

한눈에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과 직물 속 형상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 잠깐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현실의 인물이고 어디부터가 그림 속 이미지인지 헷갈린다.

벨라스케스가 의도한 시각적 효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모호함으로 볼 수 있다.

관람자는 앞쪽 공간에서는 비교적 쉽게 현실을 믿는다.

그런데 뒤쪽으로 갈수록 현실과 이미지의 경계가 흔들린다.


미네르바와 아라크네는 어디에 있을까

뒤쪽 장면에서 신화의 실마리가 나타난다.

갑옷과 투구를 갖춘 인물은 미네르바로 이해된다. 

그녀 앞에는 아라크네로 해석되는 여성이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벨라스케스가 신을 압도적으로 크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네르바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강렬한 후광으로 신성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신과 인간의 대결이 마치 실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처럼 펼쳐진다.

앞쪽의 직조 장면만 보고 있을 때는 평범한 하루처럼 느껴졌던 

그림이 이곳에서 갑자기 고대 신화와 만난다.

그러나 이 장면조차 그림의 가장 뒤에 있다.

신화를 찾으려면 관람자가 직접 화면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후경에는 미네르바와 아라크네로 해석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그 뒤 태피스트리에는 티치아노의 《유로파의 납치》와 연결되는 이미지가 펼쳐진다. 현실과 신화, 그림과 직물이 한 공간에서 겹쳐지는 부분이다.
미네르바와 아라크네의 신화


그리고 그 뒤에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후경을 더 자세히 보면 가장 복잡한 층이 나타난다.

뒤쪽을 채운 태피스트리에는 유로파가 황소의 모습으로 변한 

유피테르에게 납치되는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이미지는 티치아노의 《유로파의 납치》와 연결된다.

76편에서 살펴본 역사적 관계를 여기서는 길게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화면에서 어디에 있는가다.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의 이미지를 별도의 작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지 않았다.

신화 속 직조 경쟁의 결과물인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만들었다.

그래서 층이 하나 더 생긴다.

우리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고 있다.

그 그림 안에서 직조된 이미지를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 안에서 다시 티치아노의 그림을 만난다.

한 화면 안에 이미지가 계속 겹쳐진다.


앞과 뒤의 색도 완전히 다르다

이제 그림 전체를 다시 한번 보자.

앞쪽은 갈색과 회색, 검은색, 탁한 흰색이 중심이다.

색이 화려하게 튀어나오기보다 어두운 공기 속에 섞여 있다.

반대로 뒤쪽으로 가면 색이 달라진다.

붉은색과 밝은 색들이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빛도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이 차이 때문에 후경은 작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크기로 보면 앞쪽 여인들이 훨씬 크다.

밝기로 보면 뒤쪽이 강하다.

벨라스케스는 이 두 힘을 서로 맞세운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앞에 머물렀다가 자꾸 뒤로 끌려간다.

그리고 다시 물레와 여인들에게 돌아온다.

이 왕복 운동이 그림을 오래 보게 만든다.


물레의 회전과 여인들의 몸이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다시 처음 보았던 물레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물레 하나만 보지 말고 주변의 팔과 몸을 함께 본다.

둥근 물레가 회전한다.

그 옆의 팔이 움직인다.

중앙의 인물들이 몸을 기울인다.

오른쪽 여인의 팔과 등이 다시 방향을 바꾼다.

직선으로 딱딱하게 서 있는 인물이 거의 없다.

몸과 팔, 실과 물레가 서로 이어지면서 화면 앞쪽 전체에 회전하는 듯한 리듬이 생긴다.

그림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움직임이 끝난 순간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순간을 골랐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일이 멈추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가까이에서는 붓질, 멀리에서는 사람이 된다

실제 작품 앞에 섰다면 꼭 거리를 바꾸어 보는 것이 좋다.

먼저 조금 떨어져 본다.

여인들의 몸과 옷, 물레와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다음 가까이 가본다.

놀랍게도 방금까지 선명해 보였던 형태가 흐트러진다.

옷의 주름은 몇 번의 붓질로 바뀌고, 얼굴은 작은 색면으로 흩어지며, 

빠르게 도는 물레는 거의 추상적인 흔적처럼 보인다.

다시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벨라스케스 후기 회화의 큰 즐거움이다.

그는 모든 사물을 꼼꼼하게 완성한 뒤 관람자에게 보여주는 화가가 아니다. 

필요한 만큼만 물감을 놓고 나머지는 보는 사람의 눈이 이어 붙이도록 한다.

프라도의 고해상도 디지털 자료가 세부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런 붓질을 살펴보는 데 특히 유용하다.


가장 가까운 곳은 현실이고, 가장 먼 곳은 신화일까

마지막에는 그림 전체를 한꺼번에 보자.

가장 가까운 곳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뒤에는 다른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신화 속 인물들이 있고, 그 뒤에는 다시 태피스트리 속 이미지가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원근법처럼 보인다.

앞, 중간, 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공간의 깊이와 의미의 깊이를 겹쳐놓았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앞쪽의 여인들은 신화를 가리는 방해물이 아니다.

오히려 신화로 들어가는 입구다.

물레가 돌아가지 않고 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직물도 없다.

직물이 없다면 아라크네의 솜씨를 보여줄 이미지도 없다.

화려한 신화가 가장 뒤에 있고 

이름 없는 노동이 가장 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묘한 울림을 만든다.

《실 잣는 여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는 앞쪽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뒤쪽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그 경계가 흔들린다.

실제 여인이 있고, 신화 속 여인이 있다.

실제 직물이 있고, 직물 속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벨라스케스가 캔버스 위에 놓은 물감이다.

가까이 가면 물감이 보인다.

뒤로 물러나면 물레가 돈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그 물레 뒤에서 신화가 시작된다.

벨라스케스는 그렇게 우리의 눈을 그림의 가장 앞에서 가장 뒤까지 데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려보낸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노동일까, 신화일까, 아니면 그림을 만드는 예술 그 자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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