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톨레도를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토 토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é)이다. 겉모습은 비교적 소박한 성당이지만, 이곳에는 스페인 미술사뿐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걸작이 걸려 있다. 바로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처음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규모였다. 사진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르다. 높이가 5m가 넘는 거대한 화면 속에는 현실과 천상, 인간과 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화가 자신과 그의 아들까지 등장한다. 한 작품 안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상징을 담아낸 그림은 흔치 않다.
오르가스 백작은 누구인가?
우선 제목부터 살펴보자. 오르가스 백작(Don Gonzalo Ruiz de Toledo)은 14세기 스페인 톨레도에서 실제로 살았던 귀족이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교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기부하며 선행을 베푼 인물로 유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1323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장례식 도중 하늘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노가 직접 내려와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해 주었다는 것이다.
약 250년 후 산토 토메 성당은 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엘 그레코에게 제단화를 의뢰했고, 그는 1586년부터 1588년 사이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은 왜 위아래로 나뉘어 있을까?
이 그림을 처음 보면 누구나 위와 아래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아래쪽은 현실 세계다. 실제 장례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검은 옷을 입은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백작의 장례를 지켜보고 있다.
| 오르가스백작의 매장 하단 부분 |
반면 위쪽은 천상 세계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 수많은 천사와 성인들이 영혼을 맞이하고 있다.
| 오르가스백작의 매장 상단부분 |
그림 속에서 엘 그레코는 어디에 있을까?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화가 자신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래쪽 장례식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이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우리를 바라보는 인물이 바로 엘 그레코 자신이다.
| 그림속에 표현 해 놓은 엘 그레코 |
왜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에 넣었을까?
미술사학자들은 엘 그레코가 단순히 장면을 재현하는 화가가 아니라, 이 기적의 목격자이자 기록자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고 해석한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자신의 존재를 작품 속에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엘 그레코는 특히 강렬한 시선으로 관람자와 직접 소통하려 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이 기적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소년은 누구일까?
그림 왼쪽 아래에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검은 옷을 입고 손가락으로 장례 장면을 가리키고 있는 이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Jorge Manuel Theotocópuli)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 정도였다.
소년의 손수건에는 157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데, 이는 아들의 출생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주머니 아래쪽 1578이라고 적힌 숫자때문에 미술사학자들이 판단 가능했다는 엘 그레코의 아들 |
아버지는 아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역사 속에 남기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년은 관람자에게 그림의 핵심 장면을 안내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성인들은 누구인가?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직접 안치하고 있는 두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노이다.
화려한 황금빛 의복을 입은 성인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며, 젊은 얼굴을 한 성인이 성 스테파노이다.
특히 성 스테파노의 의복에는 그의 순교 장면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엘 그레코는 놀라울 정도의 세밀함으로 성인들의 옷감과 금실 장식을 표현했다.
천상 세계의 중심은 누구인가?
그림 가장 위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다.
예수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왼쪽에는 세례 요한이 있다.
이 세 인물은 중세와 르네상스 종교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데이시스(Deesis)' 구도를 형성한다.
| 중세 종교화에서 등장하는 데이시스 구도 |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백작의 영혼을 위해 예수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 아래에서는 천사가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고 있다. 엘 그레코 특유의 길게 늘어진 인체 표현은 인간 영혼의 영적 승화를 상징한다.
왜 이 그림이 특별한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단순한 장례 그림이 아니다.
현실과 초현실, 인간과 신,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융합된 작품이다. 엘 그레코는 실제 톨레도 시민들의 초상화를 통해 현실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신비로운 천상 세계를 창조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오늘날까지도 스페인 회화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톨레도를 다시 찾게 된다면, 나는 아마도 가장 먼저 산토 토메 성당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거대한 화면 앞에 서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순간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여러분이라면 이 그림 속에서 가장 먼저 누구를 찾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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