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79편 수르바란 《화가와 함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세부 감상, 그림을 바라보는 한 사람

프라도 미술관의 수르바란 《화가와 함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세부 감상한다. 어둠 속 그리스도의 몸과 십자가 아래 화가의 시선, 빛과 구도를 따라 작품을 천천히 살펴본다.

수르바란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그를 바라보는 화가를 깊은 어둠 속에 함께 배치했다.
수르바란  작《화가와 함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78편에서 이 그림이 왜 단순한 십자가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화가’까지 

함께 그린 작품인지 살펴봤다. 

이제 79편에서는 설명을 잠시 내려놓고 그림 안으로 들어가 보자.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1650년경 그린 이 작품은 유화다. 

프라도 미술관의 공식 작품명은 《The Crucified Christ with a Painter》이며, 

화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그 앞에 서서 바라보는 화가가 등장한다. 

프라도는 이 화가를 전통적으로 성 루가로 설명하면서도, 

수르바란 자신의 모습을 암시하는 일종의 자화상일 가능성도 함께 소개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인물을 단정해서 ‘수르바란’이라고 부르기보다 우선 ‘화가’라고 부르겠다.


먼저 두 사람 사이의 어둠을 본다

그림을 멀리서 보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의외로 십자가도, 그리스도의 상처도 아니다.

‘어둠’이다.

배경을 설명해주는 건축물도 거의 보이지 않고, 멀리 이어지는 풍경도 없다. 

어디인지 알려주는 공간적 단서가 사라져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위쪽을 차지하고, 한 사람이 그 아래에 서 있다.

이 단순한 구도가 그림을 아주 조용하게 만든다.

십자가형을 다룬 다른 그림에서 

흔히 만나는 군중의 움직임이나 극적인 사건의 전개가 여기에는 없다. 

수르바란은 사건을 펼쳐 보여주기보다 두 존재의 만남으로 화면을 압축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화가.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말도 행동도 아닌 침묵이다.

그래서 이 작품 앞에서는 그림 전체를 한꺼번에 이해하려 하기보다 

먼저 두 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는 편이 좋다. 그 거리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든다.


가장 밝은 몸이 어둠에서 떠오른다

이제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로 올려보자.

검은 배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강하게 떠오른다. 

배경에 공간을 거의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몸은 멀리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보다 눈앞으로 불쑥 나온 형상처럼 보인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거의 조각처럼 느껴지는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그 표현이 실제 그림을 볼 때 꽤 중요하다.

수르바란은 몸을 평평한 실루엣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빛이 피부 위를 지나가면서 가슴과 복부, 팔과 다리의 부피를 드러낸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분명하게 갈리면서 살이 둥글게 솟아 있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캔버스에 그려진 몸을 보면서도 

나무나 석재로 만든 종교 조각상을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주변이 어둡기 때문에 이 효과가 더욱 강해진다.

배경이 그리스도의 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워준다. 

주변이 사라질수록 몸은 더욱 또렷해진다.


검은 배경에서 밝게 떠오르는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 조각상을 마주하는 듯한 강한 입체감을 만든다.
그리스도 상반신


머리는 높이 들리지 않는다

이제 얼굴을 보자.

몸 전체의 수직선에 비해 머리는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십자가 위에서 관람자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영웅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얼굴에도 극단적인 비명이나 격렬한 고통의 표정이 강조되지 않는다.

수르바란은 고통을 과장된 몸짓으로 보여주기보다 움직임이 멈춘 몸을 통해 전달한다.

머리카락은 얼굴 주변으로 내려오고, 

수염과 얼굴의 그림자가 겹치면서 표정은 완전히 선명하게 읽히지 않는다. 

밝게 드러난 몸과 비교하면 얼굴에는 더 많은 어둠이 머문다.

여기에서 그림의 묘한 긴장이 생긴다.

그리스도의 몸은 눈앞에 있을 만큼 선명한데, 그의 내면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관람자는 몸을 볼 수 있지만 그 고통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래에 서 있는 화가에게 시선이 내려간다.


네 개의 못을 확인해본다

그리스도의 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수르바란이 십자가형을 어떻게 구성했는지가 분명해진다.

두 발이 겹쳐 하나의 못으로 고정된 방식이 아니다. 

양발이 각각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다.

즉 네 개의 못을 사용한 십자가형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방식을 뒤러가 앞서 제시했으며 

17세기 세비야에서 파체코, 벨라스케스, 알론소 카노 같은 화가들이 널리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림 앞에서는 미술사 지식보다 먼저 두 다리를 보자.

발이 따로 고정되면서 다리의 형태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한쪽 다리가 다른 쪽을 크게 가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하나의 길고 안정된 수직 형상으로 읽힌다.

십자가가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인체를 화면 안에 붙들어놓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흰 천에 모인 빛은 시선을 붙잡고, 각각 십자가에 고정된 두 발까지 자연스럽게 눈길을 이끈다.
그리스도의 다리와 두 발


흰 천에서 빛이 한 번 더 멈춘다

그리스도의 허리에는 흰 천이 둘러져 있다.

여기서는 피부와 천을 비교해서 보는 것이 좋다.

둘 다 빛을 받지만 질감은 다르다. 피부에서는 빛이 몸의 부피를 만들어내고, 

천에서는 접히고 꺾이는 면을 따라 밝음과 어둠이 빠르게 바뀐다.

수르바란은 이런 차이를 아주 잘 다루는 화가였다.

그래서 흰 천은 단순히 신체를 가리는 부분으로 끝나지 않는다. 

화면 중앙에서 빛을 받아 시선을 붙잡고, 상체와 하체 사이에 하나의 시각적인 매듭을 만든다.

검은 배경 속에서 밝은 피부가 이어지다가 흰 천에서 빛이 한 번 응축되고, 

다시 다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관람자의 눈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천천히 훑게 된다.


그런데 그림 아래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은 보통의 십자가형 그림과 완전히 달라진다.

아래쪽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십자가형 사건 속에서 울부짖거나 몸을 뒤트는 인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 인물 때문에 그림을 보는 우리의 위치도 달라진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사람’을 함께 본다.

이 차이가 매우 크다.

화가는 화면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관람자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관심은 위쪽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가 보는 곳을 우리도 보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의 화가는 행동하기보다 그리스도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화가


손에는 붓과 팔레트가 있다


화가의 손과 화구는 이 인물이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화가의 손과 화구

화가의 손으로 시선을 내려보면 이 인물의 정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물건들이 보인다.

붓과 팔레트다.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 정보에서도 이 그림에는 붓과 팔레트가 주요 요소로 분류되어 있다. 

화면 속 남자는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구는 가지고 있지만 행동보다 바라보는 행위가 앞선다.

손에 든 붓보다 시선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화가의 작업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장면처럼 읽을 수도 있다.

먼저 바라본다.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에 받아들인다.

그 뒤에야 그리는 행위가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지 화면에 적힌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수르바란이 화가의 손보다 시선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구성했다는 점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화가의 얼굴은 그리스도보다 어둡다

두 얼굴을 비교해보자.

그리스도의 몸에는 강한 빛이 닿지만 아래의 화가는 상당 부분 어둠 속에 머문다.

그 차이 때문에 화면에는 자연스럽게 위아래의 위계가 생긴다.

밝은 존재와 그를 바라보는 어두운 존재.

하지만 화가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 

얼굴과 손, 옷의 일부가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존재를 계속 의식한다.

수르바란은 빛을 화면 전체에 골고루 나누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꺼내놓는다.

그래서 어둠은 빈 공간이 아니다. 무엇을 먼저 볼 것인지 결정해주는 장치가 된다.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그다음 화가를 발견하고,

다시 화가의 시선을 따라 그리스도에게 돌아간다.

눈이 화면 안에서 하나의 왕복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스도에서 화가로.

화가에서 다시 그리스도로.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다

조금 뒤로 물러나 그림 전체를 다시 보자.

흥미로운 것은 두 인물이 매우 가까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쉽게 하나의 현실 공간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 있다.

화가는 그 아래에 있다.

하지만 주변에 구체적인 장소를 알려주는 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골고타 언덕의 한 장면처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화가 앞에 나타난 듯한 느낌도 생긴다.

바로 여기에서 ‘현실’과 ‘묵상’의 경계가 흐려진다.

화가는 실제 십자가형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혹은 화가가 그린 이미지가 눈앞에서 실제 존재처럼 나타난 것일까.

수르바란은 그 가운데 하나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어두운 배경이 그 경계를 지워버린다.


성 루가인가, 수르바란인가

화면 속 남자는 전통적으로 성 루가로 해석되어 왔다.

성 루가는 복음서 저자이면서 후대 전승에서는 

성모의 모습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화가들의 수호성인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은 

이 인물이 수르바란 자신의 모습을 암시하는 자화상일 가능성도 소개한다. 

다만 실제 얼굴을 그대로 옮긴 문자 그대로의 자화상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을 성 루가의 위치에 겹쳐놓은 ‘상징적 자화상’에 가까운 해석이다.

그래서 그림 앞에서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두 가능성을 함께 생각하면 화면이 더 재미있어진다.

성 루가라면 우리는 성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며 

그리는 화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는 셈이다.

수르바란 자신을 겹쳐놓은 것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한 화가가 자신이 평생 그려온 종교 이미지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된다.


마지막에는 화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이 그림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한 색도, 복잡한 이야기 장면도 아니다.

바라보는 행위다.

그리스도가 있고 화가가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우리가 있다.

그리스도는 화가의 시선의 대상이고, 화가는 우리의 시선의 대상이다. 

그런데 화가의 눈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의 눈도 그리스도에게 되돌아간다.

그 순간 그림 속 화가와 그림 밖 관람자의 위치가 묘하게 겹친다.

수르바란은 관람자에게 어디를 보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먼저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그려놓았다.

그 사람을 따라 우리도 본다.

그래서 프라도 미술관이 이 작품을 종교적 신앙을 위한 도구로서 

회화의 가치를 암시하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림 속 화가는 신앙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 앞에 멈춰 선 관람자이기도 하다.

실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 천천히 보면 좋다.

십자가 위에서 어둠을 밀어내며 떠오르는 그리스도의 몸, 

아래에서 그 몸을 올려다보는 화가의 얼굴, 그리고 화가의 손에 들린 붓과 팔레트다.

그 세 지점을 눈으로 연결하면 이 작품의 구조가 보인다.

그리스도 → 화가의 시선 → 화가의 손.

보는 것에서 시작해 그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림 밖에는 한 단계가 더 있다.

그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다.

약 375년 전 수르바란이 그려놓은 화가처럼, 우리 역시 그림 앞에 멈춰 서 있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특별한 장면은 

십자가형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성스러운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 때문에 《화가와 함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인 동시에, 그림을 본다는 행위 자체를 그린 그림으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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