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를 통해
16세기 초 페라라 궁정이 고대 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펴봤다.
이번에는 같은 티치아노지만 시대도, 주문자도, 그림이 만들어진 목적도 달라진다.
그래서 티치아노가 누구인지, 베네치아 회화에서 색채가 왜 중요한지,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네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는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른 질문이다.
왜 스페인의 왕이 될 펠리페 2세는 티치아노에게 신화 그림들을 연속해서 주문했을까.
그리고 티치아노는 왜 사랑의 여신 비너스에게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붙잡아도 떠나버리는 사랑을 맡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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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너스와 떠나는 아도니스 |
페라라의 축제에서 스페인 왕자의 신화로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가 만들어진 것은 1520년대였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그보다 약 30년 뒤인 1554년에 완성되었다.
이 시간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앞의 작품에서 주문자는 페라라의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였다.
자신의 궁전 안에 고대 신화의 세계를 되살리려 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군주였다.
이번 작품의 주문자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물은
훗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되는 당시의 펠리페 왕자다.
그러니 무대가 달라졌다.
한 이탈리아 궁정의 장식 계획에서 출발했던 신화화가
이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가 가운데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집 세계로 들어간다.
프라도 미술관에 따르면
티치아노와 펠리페는 1551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만나
신화화 연작에 관한 계획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1553년 티치아노가 펠리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미 ‘포에지에’ 작업이 두 사람이 알고 있는 계획처럼 언급된다.
여기서부터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펠리페 2세라고 하면 종교화만 떠올리기 쉽다
펠리페 2세라는 이름에서는 흔히 아주 엄격한 가톨릭 군주의 모습부터 떠올린다.
실제로 그는 훗날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왕권을 강하게 결합시킨 군주였고,
종교 미술의 중요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미술 수집을 그것만으로 설명하면 실제 모습의 상당 부분을 놓친다.
펠리페는 초상화와 종교화뿐 아니라 신화화를 적극적으로 소장했다.
프라도 미술관도 그의 수집에서 티치아노의 ‘포에지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일부 작품은 상당히 감각적이고 에로틱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엄격한 반종교개혁 군주라는 후대의 단순한 이미지와는 쉽게 맞지 않는다.
이것은 모순이라기보다 르네상스 궁정 문화의 성격을 보여준다.
왕이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해서 그의 궁전 모든 벽에
성인과 성경 이야기만 걸려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공간에 따라 그림의 역할도 달랐다.
공적인 공간에서 왕의 권위와 신앙을 드러내는 그림이 필요했다면,
보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고대 문학과 신화, 사랑과 욕망을 다룬 그림을 즐길 수 있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바로 그 두 번째 세계에 속한다.
‘포에지에’, 그림을 시처럼 만든다는 생각
이 작품을 이해할 때 꼭 알아두면 좋은 말이 하나 있다.
포에지에(Poesie)다.
말 그대로 옮기면 ‘시들’이라는 뜻이다.
티치아노는 펠리페를 위해 제작한 일련의 신화화를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프라도에서는 이 연작을 《다나에》, 《비너스와 아도니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디아나와 악타이온》,
《디아나와 칼리스토》, 《에우로페의 납치》로 설명한다.
제작은 대략 1553년부터 1562년 사이에 이어졌다.
왜 그림을 ‘시’라고 불렀을까.
여기에는 티치아노가 신화를 대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고대 문헌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번역하는 삽화가가 되려 하지 않았다.
시인이 같은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도 새로운 장면과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듯이,
화가 역시 문학에서 출발해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포에지에’라는 말은 단순히 신화 그림을 멋있게 부르는 별명이 아니다.
회화도 문학처럼 상상하고 변형할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깝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그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어떤 이야기일까
그림을 보기 전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알고 가는 편이 좋다.
비너스는 로마 신화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에 해당한다.
아도니스는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젊은 남자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러 고대 문헌에서 전해지지만,
티치아노가 이 그림을 만들 때 특히 중요한 원전으로 연결되는 것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비너스는 아도니스를 사랑한다.
그런데 아도니스는 사냥을 좋아한다.
비너스는 그에게 위험한 짐승을 상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특히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맹수를 공격하는 일을 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도니스는 결국 사냥에 나선다.
그리고 멧돼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받아 죽는다.
사랑의 여신조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담을 넘어간다.
사랑과 죽음이 아주 가까이 붙어버린다.
사랑의 여신인데 사랑을 지킬 수 없다
이 신화가 오래도록 화가와 시인들을 끌어당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신이라면 인간보다 강할 것 같고, 사랑의 여신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사랑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신화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힘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선택을 대신할 수도 없고,
그에게 닥칠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도 없다.
비너스는 아도니스를 사랑하지만 아도니스에게는 자신의 욕망이 있다.
그는 사냥을 원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신과
젊은 남자의 사랑보다 훨씬 인간적인 감정에 닿게 된다.
떠나려는 사람과 붙잡으려는 사람.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과 그것을 무릅쓰려는 사람.
그리고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별이다.
그런데 티치아노는 원전에 없는 순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특별해진다.
티치아노는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이 강조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비너스가 떠나려는 아도니스를 붙잡는 장면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알려진 다른 고대·당대 문헌에도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티치아노가 만들어낸 장면이다.
이 차이는 아주 크다.
화가가 단순히 “아도니스가 사냥을 나갔다”라는 문장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한순간을 새로 만들어냈다.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도니스가 죽기 전에 비너스와 헤어지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비너스는 위험을 알고 있었으니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이 붙잡으려는 바로 그 순간은 어땠을까.
여기에서 문학에는 없던 장면이 회화 안에서 태어난다.
바로 이런 것이 ‘포에지에’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을 볼 때 가장 중요한 배경지식은 아도니스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 결말을 모르고 보면 한 연인이 다른 연인을 붙잡는 장면 정도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결말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아도니스가 떠나는 것은 단순한 외출이 아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출발이다.
비너스가 그를 붙잡는 것도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곧 일어날 비극을 막으려는 행동이 된다.
관람객은 그림 속 인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도니스에게는 아직 미래인 일이 우리에게는 이미 과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림을 바라본다.
이런 방식을 흔히 극적 아이러니라고 부를 수 있다.
등장인물보다 관객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범한 행동조차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티치아노는 바로 그 시간의 차이를 이용한다.
죽음을 직접 그리지 않고도 죽음이 그림 전체를 기다리고 있게 만든다.
《다나에》와 한 쌍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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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비를 맞이하는 다나에 프라도소장본 |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처음부터 완전히 고립된 한 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다.
펠리페가 처음 받은 ‘포에지에’ 가운데 앞선 작품은 《다나에》였고,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뒤이어 전달되었다.
티치아노는 두 작품의 관계를 의식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두 그림을 함께 보면
여성의 누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여주는 구상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림이 조각처럼 인간의 몸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회화적 능력을 드러내려는 의도와 연결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의 관계는 단순한 자세 비교에만 있지 않다.
이야기의 성격도 대조적이다.
《다나에》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접근한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는 여신이 인간을 붙잡으려 하지만 인간은 떠난다.
한쪽에서는 욕망이 가까워지고, 다른 쪽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이 멀어진다.
한쪽에는 만남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별이 있다.
따라서 연작을 함께 보았던 사람에게는
두 그림이 서로 다른 형태의 사랑과 욕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시적 대구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
왜 이런 신화가 왕자의 그림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왜 펠리페는 이런 작품을 원했을까.
여기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도니스가 왕자의 젊음을 상징한다”거나 “비너스가 특정 여성을 의미한다”처럼
명확한 근거 없이 인물을 현실 인물에 대응시키면 안 된다.
프라도 미술관은 ‘포에지에’를 특정한 도덕적 교훈이나
복잡한 상징 체계로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오히려 티치아노가 시인처럼 원전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회화 자체의 가능성을 펼친 작품군으로 설명한다.
당시의 왕자에게 이런 그림을 소유한다는 것은 여러 층위의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고대 문학을 알고 있다는 교양이 있었다.
신화 속 사랑과 욕망을 즐길 수 있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회화를 개인적으로 소유한다는 만족도 있었다.
그리고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포에지에’는 단순한 방 장식이 아니라
펠리페와 티치아노 사이에 여러 해 동안 이어진 하나의 장기 프로젝트였다.
왕에게 주어진 자유, 화가에게 주어진 자유
이 연작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주문자와 화가의 관계다.
알폰소 1세 데스테의 알라바스터 방에서는
공간 전체의 장식 계획과 고대 문헌이 작품 제작의 중요한 틀이 되었다.
펠리페의 ‘포에지에’에서는 티치아노에게 더 큰 주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프라도는 이 연작이 펠리페의 일방적인 명령도,
티치아노 혼자 시작한 계획도 아니었다고 본다.
두 사람이 공유한 관심에서 나온 프로젝트였으며,
펠리페가 신화화 연작을 주문하고 티치아노에게 주제와 표현 방식에서
상당한 자유를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자유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티치아노는 이미 알려진 신화를 반복하지 않고,
원전에 없는 순간까지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가의 역할도 달라진다.
문학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과 경쟁하는 사람이 된다.
시인이 말로 보여주지 않은 순간을 화가가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이 그림의 진짜 배경에는 ‘시간’이 있다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에서는 축제와 풍요라는 세계가 중요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시간이다.
붙잡는 순간과 떠나는 순간.
사랑하는 순간과 잃는 순간.
아직 살아 있지만 곧 죽게 될 사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실 몇 초에 불과한 순간에 걸려 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의 앞에는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사랑이 있고, 뒤에는 아도니스의 죽음이 있다.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생각하며 그림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신화는 과거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경험,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경험처럼 시대와
관계없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으로 바뀐다.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만나기 전에
《비너스와 아도니스》 앞에 섰을 때 신화의 모든 계보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몇 가지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이 그림은 1554년,
훗날 스페인 국왕이 되는 펠리페 2세를 위한 신화화 프로젝트의 초기 작품이다.
티치아노는 이 연작을 단순한 ‘신화 그림’이 아니라 ‘포에지에’, 즉 시라고 불렀다.
그리고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이야기는
사랑의 여신조차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비극으로 끝난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림에서 만나게 될 결정적인 순간은
고대 문헌에 그대로 적혀 있던 장면이 아니다.
티치아노가 새로 만들어낸 순간이다.
그래서 《비너스와 아도니스》는 고대 신화를 충실하게 설명하는 삽화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화가가 새로운 한순간을 끼워 넣어,
전혀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낸 그림이다.
그리고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그 순간은 더욱 잔인하다.
비너스는 붙잡으려 한다.
아도니스는 떠나려 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림 앞에 서면 된다.
그러면 500년 전의 신화가 갑자기 아주 단순하고 오래된 인간의 이야기로 바뀐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