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67편 리베라 《이사악과 야곱》 세부 감상, 손끝에서 들킬 뻔한 거짓말

 

호세 데 리베라, 《이사악과 야곱》, 1637년, 캔버스에 유채, 110 × 291.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리베라 작《이사악과 야곱》


《이사악과 야곱》 앞에 서면 먼저 그림의 모양부터 낯설게 느껴진다.

그 긴 화면 안에 리베라는 한순간을 늘여 놓았다.

왼쪽에는 침대에 몸을 일으킨 늙은 이사악이 있다. 

그 앞에는 야곱이 몸을 숙이고 있고, 바로 뒤에는 리브가가 붙어 있다. 

오른쪽에는 음식이 놓인 탁자가 있으며, 더 멀리 열린 공간을 통해 다른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다.

손이다.

이 그림의 거짓말은 말로 시작되었지만, 

성공과 실패는 결국 손끝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왼쪽, 침대 위의 이사악을 본다

시선을 화면 왼쪽으로 옮기면 늙은 이사악이 침대에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꼿꼿하게 앉아 있지 않는다. 

몸은 침구에 기대어 있고 상체만 앞으로 나온다. 

늙고 쇠약한 육체라는 사실이 자세에서부터 드러난다.

얼굴도 젊은 성인의 얼굴처럼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희끗한 머리와 수염, 주름진 얼굴이 보인다. 

리베라는 이사악을 성경 속의 위대한 족장이라는 이유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시력을 잃은 한 노인의 몸으로 그린다.

여기서 이사악의 눈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얼굴은 야곱 쪽을 향하지만, 시선으로 아들을 확인하는 모습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이사악을 눈먼 노인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이사악에게 필요한 것이 손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만져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을 리베라가 그림의 중심 사건으로 끌어왔다.


이 그림의 중심은 ‘만지는 손’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사악은 손으로 아들을 확인한다. 야곱의 팔을 덮은 가죽이 속임수의 결정적인 장치가 된다.
야곱의 팔을 만지는 이사악


이제 이사악의 얼굴에서 팔을 따라가 보자.

손이 야곱의 팔을 더듬고 있다.

야곱의 팔에는 털처럼 보이는 가죽이 덮여 있다. 

성경 이야기에서 리브가가 야곱의 매끄러운 피부를 감추기 위해 사용한 위장이다. 

프라도는 이를 양가죽(sheepskin, 

창세기 원문에서는 어린 염소가죽으로 표현)으로 설명하며, 

이 촉각의 문제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지적한다.

멀리서 보면 작은 부분이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가 바로 이 접촉에 걸려 있다.

이사악은 지금 눈으로 아들을 보는 대신 피부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관람자는 그가 만지고 있는 것이 진짜 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긴장이 생긴다.

이사악의 손이 조금만 더 정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야곱의 위장이 들통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화면에서 가장 극적인 행동은 칼을 휘두르거나 누군가 쓰러지는 것이 아니다.

늙은 아버지가 아들의 팔을 만지는 행동이다.

리베라는 아주 작은 촉각 하나를 사건의 절정으로 만들었다.


야곱의 몸은 앞으로 가지만 마음은 멈춰 있는 듯하다

이번에는 야곱을 본다.

그는 이사악 가까이 몸을 가져간다.

하지만 자세를 보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상체를 숙이고 아버지에게 팔을 내어주면서도 

몸 전체에는 어딘가 굳어 있는 듯한 긴장이 있다.

옷의 색도 눈에 들어온다.

야곱의 푸른 옷은 주변의 갈색과 붉은색, 

어두운 색조 사이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긴 화면 속에서도 야곱의 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그의 얼굴이다.

야곱은 승리한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거짓말을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완전히 받아낸 뒤의 인물이 아니다. 

바로 지금 아버지가 자신의 팔을 만지고 있다.

야곱의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래서 이 얼굴을 볼 때는 ‘속이는 악인’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하기보다 들킬 가능성을 

견디고 있는 사람의 얼굴로 보는 편이 그림에 더 가깝다.

리베라는 감정을 과장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입을 크게 벌려 두려움을 표현하지도 않고, 눈을 치켜뜨게 만들지도 않는다.

몸의 기울기와 인물 사이의 거리만으로 충분히 불안을 만든다.


야곱의 등 뒤에는 리브가가 있다


아버지에게 몸을 기울인 야곱의 바로 뒤에 리브가가 붙어 있다. 두 인물의 가까운 거리가 속임수를 함께 실행하는 긴장을 만든다.
야곱 뒤에 서 있는 리브가


야곱 혼자였다면 이 장면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 어머니 리브가가 있다.

그녀는 멀리 떨어져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야곱 바로 뒤까지 들어와 있다.

오래된 프라도 소장품 목록의 작품 설명에서도 

이 관계가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리브가는 야곱 뒤에서 속임수의 결과를 기다리며, 

위험한 일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등을 떠미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의 몸이 거의 하나의 덩어리처럼 붙어 보인다.

야곱이 앞으로 기울면 리브가도 그 움직임을 따라온다.

그래서 야곱과 이사악 사이에는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 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리브가의 의지가 끼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리브가는 사건의 구경꾼이 아니다.

그녀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

리베라는 그 사실을 설명문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야곱의 등 바로 뒤에 리브가를 붙여놓는 것으로 보여준다.

야곱의 몸은 아버지를 향하지만, 

그 몸을 앞으로 밀어주는 힘은 뒤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 사람의 얼굴보다 세 사람의 몸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이제 잠시 한 사람씩 보는 것을 멈추고 이사악, 야곱, 리브가를 한꺼번에 보자.

세 사람은 매우 가까이 붙어 있다.

이사악은 오른쪽으로 몸을 내밀고, 야곱은 왼쪽의 아버지에게 몸을 기울인다. 

리브가는 다시 야곱의 뒤에서 앞으로 다가온다.

몸의 방향이 서로 맞물린다.

그 때문에 화면 왼쪽에 강한 밀도가 생긴다.

재미있는 것은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리브가도 안다.

관람자도 안다.

이사악만 모른다.

그래서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세 사람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데도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거리가 생긴다.

리베라는 그 차이를 인물들의 머리 위에 글자로 적어놓지 않았다.

서로의 위치와 몸의 방향으로 만든다.

이 그림에서 구도를 보는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침대의 붉은색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보자

이제 시선을 조금 넓힌다.

이사악 주변에는 침대와 천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붉고 따뜻한 계열의 색이 왼쪽 공간을 감싸면서 

노인의 몸을 화면 속에 붙잡아 둔다. 

침구의 부드러운 질감과 사람의 피부, 옷감의 질감도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리베라는 이런 차이를 꽤 집요하게 그리는 화가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사실적으로 잘 그렸다’고 보는 것보다,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세계를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만하다.

부드러운 천.

늙은 피부.

수염.

야곱의 옷.

팔을 덮은 가죽.

모두 촉감이 다른 것들이다.

눈먼 이사악이 손으로 세상을 확인하는 이야기에서 

화면 전체가 서로 다른 촉감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프라도가 이 작품을 리베라가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던 

‘감각’의 문제와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리베라는 1610년대 중반 이미 오감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했고,

 시각장애와 촉각의 관계도 작품에서 탐구했다.

하지만 실제 그림 앞에서는 어려운 미술사 용어부터 떠올릴 필요가 없다.

천과 피부를 번갈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손으로 만지는 느낌을 생각하게 된다.


오른쪽 탁자는 그냥 정물화가 아니다

탁자 위 음식과 식기는 이사악에게 바칠 식사를 보여준다. 인물극 한쪽에 자리한 정물도 성경의 사건을 이어가는 장치가 된다.
탁자 위 음식과 식기


이제 시선을 화면 오른쪽으로 옮겨보자.

탁자 위에 음식과 그릇이 놓여 있다.

여기서 갑자기 작은 정물화 하나가 그림 속에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고기와 접시, 빵, 병과 식기 같은 물건들이 인물들과 떨어져 놓여 있다. 

프라도의 작품 자료 역시 이 화면에서 

빵, 칼, 고기, 접시, 병, 포도주 등을 주요 요소로 분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음식은 이야기와 직접 연결된다.

이사악이 장남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종류의 음식이 

속임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라도는 오른쪽 탁자의 정물, 

특히 사냥한 고기를 담는 접시가 이사악의 요구와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리베라는 상징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음식은 음식처럼 보인다.

접시는 접시처럼 보인다.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장면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성경의 사건이 먼 고대의 세계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방금 식사를 준비해 놓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사건처럼 바뀐다.


손에서 음식으로, 다시 감각의 문제가 이어진다

왼쪽의 손과 오른쪽의 음식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둘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다.

이사악은 야곱의 몸을 만진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에사우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준비된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감각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화면을 다시 보면 오른쪽의 정물은 단순히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그려놓은 소품처럼 보이지 않는다.

프라도 역시 이 작품을 촉각과 감각의 문제와 연결한다.

그런데 더 묘한 것은 관람자의 위치다.

우리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다.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음식 맛도 볼 수 없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시각뿐이다.

그림 속에서 이사악에게 결여된 바로 그 감각이다.

리베라는 눈먼 사람을 그리면서 오히려 보는 사람의 눈을 시험한다.


그리고 화면 깊숙한 곳에 한 사람이 더 있다


화면 오른쪽 깊숙한 곳에는 사냥에서 돌아오는 에사우가 작게 보인다. 앞에서는 속임수가 진행되고, 뒤에서는 그 비밀을 드러낼 인물이 다가온다.
멀리 돌아오는 에사우

탁자만 보고 지나치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다.

화면 오른쪽 뒤쪽의 열린 공간을 보자.

멀리 작은 인물이 보인다.

에사우다.

프라도의 작품 해설과 도상 설명에서 이 그림은 

야곱이 형 에사우의 자리를 대신해 축복을 받는 순간을 다룬다. 

에사우는 아버지가 요구한 사냥감을 마련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상태다.

리베라는 그를 화면 중심으로 끌어오지 않는다.

아직 사건의 중심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긴 가로 화면을 보는 데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다.

왼쪽에서는 거짓말이 진행되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그 거짓말을 무너뜨릴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한 화면에 서로 다른 시간이 함께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른쪽의 작은 인물을 발견하고 나면 그림의 긴장이 달라진다.

“들킬까?”

라는 질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곧 돌아온다.”

관람자는 야곱과 리브가가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다음 순간까지 예상하게 된다.


긴 화면은 시선을 천천히 움직이게 한다

이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림 전체를 다시 보자.

왜 이렇게 옆으로 길게 그렸는지 조금씩 이해된다.

리베라는 모든 인물을 화면 중앙에 뭉쳐놓지 않았다.

왼쪽의 침대와 이사악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야곱과 리브가를 지나면서 긴장이 가장 높아진다.

그다음 오른쪽 탁자의 음식으로 눈이 움직인다.

그리고 더 뒤의 공간까지 가면 에사우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즉 시선이 

이사악 → 야곱의 팔 → 야곱 → 리브가 → 탁자 → 뒤쪽 공간으로 이동한다.

물론 실제로 그림을 보는 눈은 이 순서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리베라는 긴 가로 화면 곳곳에 이야기를 읽을 단서를 나누어 놓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눈에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면서 

동시에 천천히 읽어야 하는 그림이다.


빛은 사건의 중심을 골라낸다

이제 마지막으로 빛을 보자.

화면 전체가 똑같은 밝기로 펼쳐져 있지 않다.

인물의 얼굴과 손, 옷과 침구의 일부가 밝아지고, 

그 주변은 더 어두운 공간으로 물러난다.

특히 우리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분들이 빛을 받아 눈에 들어온다.

이사악의 얼굴.

야곱의 얼굴과 몸.

서로 접촉하는 손과 팔.

리브가의 존재.

리베라의 빛을 볼 때 모든 밝은 부분을 곧바로 ‘신의 빛’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그림에서는 먼저 무엇을 보게 만드는 빛인가를 확인하는 편이 좋다.

빛은 사건을 설명한다.

누가 누구에게 접근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보아야 하는지를 골라준다.

그리고 어둠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뒤로 밀어낸다.

그래서 화면은 인물이 여럿이고 사물도 적지 않은데 복잡하게 흩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다시 손으로 돌아온다

그림 전체를 다 본 뒤 다시 가운데의 손을 보자.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사악은 의심했다.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직접 만져본다.

보통 우리는 직접 손으로 확인하면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정반대다.

확인하기 위해 내민 손이 오히려 속임수를 완성한다.

야곱의 팔을 덮은 가죽은 작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 전체를 움직이는 장치다. 

리베라는 그 촉감을 실제처럼 그려 관람자까지 

이사악의 판단에 참여시키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눈먼 이사악은 손을 믿는다.

야곱은 그 손을 속인다.

리브가는 뒤에서 결과를 기다린다.

에사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람자는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래서 《이사악과 야곱》 앞에서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화려한 기적도, 장대한 풍경도 아니다.

늙은 아버지의 손과 젊은 아들의 팔이다.

리베라는 거의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면을 펼쳐놓고도 

결정적인 사건을 손바닥만 한 공간에 압축했다.

그 작은 접촉 하나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잘못 알아본다.

형은 축복을 빼앗긴다.

동생은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손을 멈출 수 없다.

《이사악과 야곱》을 실제로 만났다면 얼굴만 보고 지나가지 말자.

먼저 이사악의 손을 찾는다.

그 손에서 야곱의 팔로 간다.

야곱의 몸 뒤에 붙은 리브가를 본다.

오른쪽 탁자의 음식으로 이동한다.

마지막에는 화면 깊숙한 곳까지 눈을 보내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처음의 손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이 그림이 

단순히 ‘야곱이 축복을 가로챈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느낄 수 있다.

리베라가 그린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의 손과,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관람자의 눈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성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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