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66편 리베라 《이사악과 야곱》, 축복을 훔치기 위해 아버지를 속인 아들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 아버지 앞에 섰다. 

어머니는 그 거짓말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직접 계획했다. 

그리고 진짜 축복을 받아야 할 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호세 데 리베라가 

1637년에 그린 《이사악과 야곱》은 성경 속 한 가족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르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두 아들 사이에서 사랑과 편애, 속임수와 축복,

 인간의 선택과 신의 섭리가 복잡하게 얽힌다.

리베라는 이 오래된 성경 이야기를 

17세기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바꾸었다.

그것도 무려 가로 291.5cm에 이르는 긴 화면에 펼쳐놓았다. 

높이는 110cm밖에 되지 않는다. 보통의 종교화와는 상당히 다른 비율이다.

왜 리베라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길고 현실적인 그림으로 만들었을까.

이번 66편에서는 아직 얼굴이나 손을 하나씩 들여다보지 않는다. 

먼저 이 그림 밖으로 나가보자. 

《이사악과 야곱》이 탄생한 1637년의 나폴리와 리베라, 그리고 

이 그림의 바탕이 된 성경 이야기부터 알아야 한다.


호세 데 리베라, 《이사악과 야곱(Isaac and Jacob)》, 1637년, 캔버스에 유채, 110 × 291.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호세 데 리베라 작《이사악과 야곱》

스페인 화가가 나폴리에서 그린 성경 이야기

리베라는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하티바에서 태어났지만 

화가로서의 삶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특히 1616년 무렵 나폴리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당시 나폴리는 단순한 이탈리아의 도시가 아니었다.

17세기 전반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있었고, 

스페인 국왕을 대신하는 총독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 출신이면서 이탈리아 미술을 몸으로 익힌 

리베라의 위치는 상당히 독특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지만 

스페인과의 연결도 끊어지지 않았다. 

작품은 스페인 귀족과 왕실 수집가들에게도 알려졌고,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리베라가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주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앞선 리베라 작품들에서 이미 그의 화풍을 여러 번 보았으니 

생애 이야기를 처음부터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사악과 야곱》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1637년이라는 제작 연도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해를 리베라의 경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설명한다. 

바로 이 무렵 리베라는 나폴리 총독으로 부임한 

메디나 데 라스 토레스 공작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고, 

산 마르티노의 카르투시오 수도회와도 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를 비롯해 그의 성숙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사악과 야곱》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나온 작품이다.

젊은 시절 카라바조의 강렬한 자연주의를 받아들였던 

리베라는 이제 그것만으로 그림을 만들지 않았다. 

프라도의 해설처럼 이 작품에는 카라바조적인 사실성과 

함께 공간, 대기, 색채를 다루는 보다 성숙한 감각이 나타나며,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리베라가 

자기 화풍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시기의 그림이다.


모든 것은 한 번의 축복에서 시작된다

그림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창세기 27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사악에게는 쌍둥이 아들 에사우와 야곱이 있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은 에사우였다. 

그는 사냥에 능한 사람이었다. 

동생 야곱은 형과 성격이 달랐고, 

두 형제를 향한 부모의 마음도 같지 않았다. 

이사악은 에사우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문제는 이사악이 늙고 눈이 어두워지면서 벌어진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이사악은 

맏아들 에사우에게 사냥을 나가 음식을 만들어오라고 한다. 

그 음식을 먹은 뒤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려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오늘날 우리가 가볍게 말하는 

“잘되기를 바란다” 정도의 인사가 아니다.

성경의 족장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축복은 

가문의 미래와 후계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매우 무거운 행위다.

 한번 내려진 축복은 단순히 말을 취소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는 처음부터 긴장이 걸려 있다.

누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


어머니 리브가가 움직인다

이사악과 에사우의 대화를 리브가가 듣는다.

리브가는 에사우가 사냥을 나간 사이 야곱을 불러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음식을 준비할 테니 그것을 아버지에게 가져가 

형 대신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아들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사우의 몸에는 털이 많았지만 야곱의 피부는 매끄러웠다. 

이사악이 손으로 만져보기라도 한다면 거짓말은 바로 들통날 수 있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옷을 입히고 그의 손과 

목의 매끄러운 부분에 어린 염소의 가죽을 덮는다.

야곱은 이제 눈으로 보아서는 물론이고 냄새와 촉감으로 확인해도 

에사우처럼 느껴지도록 위장한 셈이다.

프라도 미술관이 《이사악과 야곱》을 설명하면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사우로구나”

야곱이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이사악은 이상함을 느낀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야곱 같다. 하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털이 있다. 

옷에서는 에사우의 냄새가 난다.

눈을 사용할 수 없는 아버지는 다른 감각에 의존한다.

듣는다.

만진다.

냄새를 맡는다.

그런데 그 감각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다.

창세기에서 이사악의 혼란을 압축하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사악은 속는다.

그리고 야곱에게 축복을 내려준다.

얼마 뒤 진짜 에사우가 사냥에서 돌아온다. 

음식을 준비해 아버지에게 가져가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동생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사우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야곱은 결국 형의 분노를 피해 집을 떠나야 한다.

리베라가 선택한 것은 바로 모든 것이 들통나기 직전의 순간이다.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하는 가장 팽팽한 시간을 붙잡은 것이다.


그런데 왜 야곱이 축복을 받는가

여기서 현대 독자는 조금 당황할 수 있다.

“아버지를 속였는데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고?”

맞다.

그래서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한 도덕 교훈으로 읽기 어렵다.

창세기의 더 앞부분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에사우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팥죽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기는 사건도 먼저 벌어진다.

따라서 창세기의 큰 흐름에서 야곱이 선택되는 것은 

이 한 번의 속임수만으로 갑자기 결정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리브가와 야곱의 행동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욕망과 편애와 속임수를 숨기지 않은 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인간들의 행동 속에서도 더 큰 역사가 이어진다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야곱은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으로 연결된다.

그러니 이사악의 침상 곁에서 벌어지는 이 조용한 속임수는 

한 가족의 재산 문제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성경 전체의 역사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계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된다.


리베라는 기적 대신 인간을 선택했다

이 주제를 그릴 때 리베라가 택한 방식이 재미있다.

하늘이 열리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도 아니다.

신이 직접 화면에 등장해 누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알려주지도 않는다.

대신 늙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를 속이려는 아들, 

그 일을 주도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에사우가 돌아오고 있다.

즉 리베라는 신의 계획을 직접 그리는 대신 

그 계획 속에서 판단하고 망설이고 속이고 속는 인간을 그렸다.

이런 선택은 리베라가 오래 탐구했던 자연주의와도 잘 맞는다.

성경 속 인물을 이상적인 영웅으로 멀리 밀어놓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악과 야곱》을 처음 보면 

종교화라기보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는 사람

여기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생긴다.

감각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작품을 오감의 문제와 연결해 설명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사악에게 시각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를 듣고, 

아들의 몸을 만지고, 옷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대신하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감각들이 조작된다.

이 주제는 리베라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는 이미 1610년대에 오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했고, 

시각장애를 통해 촉각이라는 감각을 탐구한 그림도 남겼다. 

프라도 역시 《이사악과 야곱》을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여기서 재미있는 역전이 일어난다.

그림 속 이사악은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림 밖의 우리는 본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애쓰지만, 

관람자는 처음부터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그림에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뜻을 넘어선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보는 일과 연결된다.


1637년, 리베라가 도달한 성숙기

《이사악과 야곱》은 유화로 그린 대형 캔버스 작품이다. 

크기는 110×291.5cm다.

특히 이례적인 것은 가로로 극단적으로 긴 화면이다.

프라도의 미술사 해설에서도 

이 작품의 독특한 형식이 리베라의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카라바조에서 출발한 강한 자연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베네치아 회화에서 배운 색채와 공간감, 대기의 느낌을 함께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초기의 리베라를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끌어내는 화가’로만 기억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1637년의 리베라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빛과 어둠의 충돌만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보다 

여러 인물이 한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심리와 이야기의 시간을 조절할 줄 아는 

화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들통나기 직전의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나폴리에서 그려져 스페인 왕실로

이 그림의 초기 주문 경위를 모든 단계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1637년 리베라가 

당시 나폴리 총독 메디나 데 라스 토레스 공작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프라도 역시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그 관계를 중요한 제작 배경으로 제시한다.

이후 작품은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들어갔다.

프라도가 공개한 소장 이력을 보면 

1747년 마드리드의 신왕궁 목록에서 이미 리베라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772년, 1794년, 1814~1818년 왕궁 목록에서도 계속 확인된다. 

한때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를 거쳤으며 왕립미술관, 

즉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의 컬렉션으로 이어졌다.

18세기 말에는 이 그림을 바탕으로 한 판화까지 제작되었다.

1791년 마누엘 데 라 크루스 바스케스의 밑그림과 

프랑수아 로베르 앵구프의 작업을 통해 

리베라의 《이사악과 야곱》이 판화로 옮겨졌다. 

왕궁이 소장한 주요 회화를 판화로 보급하려던 사업의 일부였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오래전부터 왕실 컬렉션 안에서 

리베라를 대표하는 중요한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축복의 그림이 아니라 ‘판단’의 그림

《이사악과 야곱》을 단순히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는 장면”이라고 기억하면 

이 작품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리베라가 붙잡은 것은 훨씬 미묘하다.

나는 지금 누구를 믿고 있는가.

내 귀가 들려주는 것이 진실인가.

손으로 만져 확인한 것은 믿을 수 있는가.

냄새는 거짓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눈으로 본다고 해서 정말 진실을 알고 있는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사악은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하지만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반대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관람자는 처음부터 속임수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는 어느 순간 우리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 사실이 《이사악과 야곱》을 묘하게 불편하고 긴장된 그림으로 만든다.

1637년의 리베라는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를 멀리 있는 

성스러운 과거로 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팔을 확인하고, 아들은 들킬까 두려워하고, 

어머니는 계획이 성공하기를 기다리는 인간의 사건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가족의 조용한 방 안에 아주 큰 질문 하나를 숨겨두었다.

인간은 과연 자신의 감각만으로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가.

그 질문을 알고 《이사악과 야곱》 앞에 서면, 

가로 3미터에 가까운 긴 화면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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