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57편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세부 감상, 스물여섯 살 뒤러의 얼굴과 장갑 그리고 창밖 풍경

 56편에서 이 그림이 태어난 시대와 뒤러가 

자신을 어떤 예술가로 보여주려 했는지를 살펴봤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고 그림 앞으로 가보자.

프라도 미술관의 《자화상》은 크기가 52×41cm에 불과하다. 

실제 작품 앞에 서면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498년, 목판에 유채, 52 × 41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알브레히트 뒤러 1498년 자화상


그런데 화면 속 뒤러는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과 상반신이 화면 가까이 다가와 있고, 

화려한 옷과 장갑 낀 손이 아래쪽을 채운다. 

한쪽에는 창이 열려 있고 그 너머로 멀리 풍경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얼굴에서 시작해 옷과 손을 지나 

마지막에는 창밖까지 천천히 시선을 옮겨보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얼굴이다


뒤러는 몸을 비스듬히 두고 얼굴을 관람자 쪽으로 돌렸다. 차분한 시선과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젊은 화가의 존재감을 만든다.
뒤러 자화상의 얼굴과 머리카락

그림 앞에 서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뒤러의 얼굴로 간다.

얼굴은 정면이 아니다. 

몸도 약간 비스듬히 돌아가 있다. 

뒤러는 몸을 화면 안쪽으로 틀면서 얼굴을 관람자 쪽으로 돌렸다.

그래서 2년 뒤인 1500년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정면의 강한 대칭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여기서는 조금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편안하기만 한 얼굴은 아니다.

눈은 우리 쪽을 향한다. 크게 뜨지도 않았고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입도 굳게 다문 편이다.

웃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안하거나 긴장한 표정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면서 침착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눈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 관계가 생긴다.

우리가 뒤러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뒤러도 우리를 보고 있다.

자화상이므로 원래는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에서는 그 시선이 관람자를 향한다.

500년도 더 전에 자신을 바라봤던 화가의 눈과 지금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화면 위에서 만나는 셈이다.


피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긴 머리카락


얼굴 주변에는 긴 갈색 머리카락이 내려온다.

뒤러의 자화상을 기억하게 만드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머리카락은 단순한 갈색 덩어리로 처리되지 않았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나뉘고, 굽이치는 머리카락의 흐름이 얼굴 주변을 감싼다.

특히 머리카락이 얼굴 양옆으로 내려오면서 밝은 피부와 대비된다.

이 때문에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기서 뒤러의 관찰력을 볼 수 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모두 같은 강도로 그린 것이 아니다. 

얼굴 가까이에서는 비교적 또렷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옷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점차 어둠과 섞인다.

수염도 마찬가지다.

아직 젊은 남자의 얼굴이다. 풍성한 긴 수염이 얼굴을 덮지 않는다. 

입술 주변과 턱에 비교적 가볍게 자리 잡은 수염이 보인다.

매끈한 피부와 머리카락, 수염의 질감이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이 작은 그림 안에서 뒤러는 사람의 얼굴만 그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표면을 구별해 보여준다.


머리 위의 모자가 만드는 실루엣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면 머리에 쓴 모자가 보인다.

모자는 머리 위에서 화면의 윤곽을 넓힌다. 

머리카락과 함께 뒤러의 상반신을 더욱 풍성하게 보이게 한다.

색도 눈에 띈다.

화면 전체에는 갈색과 회색, 흰색처럼 비교적 차분한 색이 많다. 

그 사이에서 모자의 밝은 부분은 얼굴 주변에 또 하나의 시각적 강조점을 만든다.

이 모자 때문에 뒤러는 작업장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옷을 갖춰 입고 외출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나선 젊은 남자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신분을 단정하기보다는 

먼저 화면이 주는 인상을 보는 편이 좋다.

화가는 자신의 외모를 흐트러진 모습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머리부터 옷까지 매우 의식적으로 정돈했다.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옷이 달라진다


이제 얼굴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자.

옷이 상당한 면적을 차지한다.

먼저 목 주변의 밝은 셔츠가 보인다. 밝은 천은 

얼굴 아래에서 빛을 받아 화면을 환하게 만든다.

그 위와 주변으로 어두운 옷이 겹쳐진다.

밝음과 어두움이 반복되기 때문에 옷이 한 덩어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천과 장식이 겹쳐 있다는 느낌이 난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뒤러가 옷을 단순히 ‘비싼 옷’처럼 보이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마다 표면이 다르다.

부드럽게 접히는 부분이 있고, 두껍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며, 

가장자리의 장식은 또 다른 질감을 만든다.

뒤러가 왜 북유럽 회화의 세밀한 관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화가인지 이런 곳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이름보다 표면을 보는 것이다.

‘옷’이라고 한 번에 지나가지 않고 이 천은 얼마나 두꺼운지, 

저 부분은 빛을 어떻게 받는지, 

접힌 곳에서는 색이 얼마나 어두워지는지를 계속 관찰한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얼굴이 살아난다


그림의 색은 생각보다 요란하지 않다.

오히려 제한된 색 안에서 차이를 만든다.

밝은 피부와 흰 셔츠가 있고, 그 주변을 갈색 머리카락과 어두운 옷이 감싼다. 

여기에 모자와 옷의 밝은 부분이 화면에 리듬을 만든다.

이 배치 덕분에 얼굴이 묻히지 않는다.

만약 옷 전체가 얼굴만큼 밝았다면 시선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뒤러는 얼굴 주변에 어두운 영역을 두면서 피부의 밝기를 살린다.

그렇다고 얼굴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과장하지는 않는다.

빛은 비교적 차분하다.

강한 명암으로 극적인 사건을 만드는 그림이 아니다.

빛은 얼굴의 형태를 보여주고, 천의 주름을 드러내고, 

머리카락의 굴곡을 구별하게 한다.

이 그림에서 빛은 무언가를 외치기보다 표면을 설명한다.


그리고 장갑 낀 손을 보자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세부. 흰 셔츠와 갈색 옷 아래로 회색 장갑을 낀 두 손이 포개져 있고, 오른쪽 위에는 제작 연도와 뒤러의 서명이 보인다
뒤러 자화상의 장갑 낀 두 손과 서명


얼굴 다음으로 오래 볼 만한 곳이 손이다.

화면 아래쪽에 장갑 낀 손이 놓여 있다.

자화상에서 손은 얼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특히 화가에게 손은 특별하다.

그림을 실제로 만드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러는 그 손을 맨손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장갑을 끼고 있다.

여기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상징이 아니라 모습이다.

손은 화면 아래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놓여 있다. 

무언가를 움켜쥐거나 힘을 주는 자세가 아니다. 

붓도 들고 있지 않고 작업 도구도 없다.

손가락의 형태는 장갑 안에서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래서 이 손은 ‘일하는 손’이라기보다 초상화를 위해 자세를 취한 사람의 손처럼 보인다.

56편에서 살펴봤듯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장갑을 

당시 뒤러가 자신에게 부여한 사회적 이미지와 연결해 설명한다.

하지만 그림 앞에서는 그 해석보다 먼저 한 가지 대비가 눈에 들어온다.

화가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손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자화상의 분위기가 분명해진다.

뒤러는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한 인물로서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손이 화면 아래쪽을 붙잡는다


구도에서도 손의 역할이 크다.

얼굴만 있었다면 화면의 중심이 위쪽에 몰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래쪽에 손과 옷이 넓게 자리하면서 무게가 내려온다.

얼굴에서 시작한 시선이 목과 옷을 지나 손까지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그리고 손에서 시선이 멈춘다.

이 때문에 상반신 초상인데도 몸이 잘린 느낌이 강하지 않다.

손이 일종의 마침표처럼 화면 아래를 정리한다.

손의 방향과 팔의 흐름도 완전히 수직적이지 않다.

몸이 비스듬히 놓여 있기 때문에 화면 안에 완만한 사선이 생긴다.

정적인 초상이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제 뒤러에게서 잠시 눈을 떼어보자


인물 옆의 작은 창 너머로 먼 풍경이 펼쳐진다. 가까이 있는 뒤러와 멀리 물러난 풍경의 대비가 작은 화면에 깊이를 만든다.
창밖 먼 풍경


이 그림에서 얼굴과 옷만 보고 지나치기 쉬운데, 

한쪽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 있다.

창이다.

그리고 창밖으로 풍경이 보인다.

여기서 그림의 공간이 갑자기 깊어진다.

앞에는 뒤러가 있다.

그 뒤에는 실내가 있다.

그리고 창을 통과하면 훨씬 먼 외부 세계가 펼쳐진다.

작은 화면 안에 가까운 인물과 먼 풍경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북유럽 초상화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뒤러의 자화상에서는 창밖 풍경이 특히 재미있는 역할을 한다.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뒤러에게만 갇혀 있던 시선에 

작은 탈출구를 만들어준다.


창밖에는 무엇이 보일까


창밖을 확대해서 보면 단순한 푸른색 배경이 아니다.

멀리 산악 풍경이 이어지고 하늘과 땅이 구별된다. 

가까운 인물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규모로 묘사되어 있어 상당히 먼 거리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은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크지 않다.

그런데 효과는 크다.

실내에 있는 인물 뒤로 실제 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기 때문이다.

뒤러의 머리와 몸은 화면 가까이에 있다.

반면 창밖 풍경은 멀리 물러난다.

이 거리 차이 때문에 작은 목판이 갑자기 깊어진다.

얼굴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세밀하게 보던 눈이 어느 순간 먼 산까지 이동한다.

가장 가까운 것과 가장 먼 것이 한 화면 안에 들어 있다.


두 공간을 나누는 창


창은 단순히 풍경을 보여주는 구멍만은 아니다.

실내와 외부를 분리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뒤러가 있는 공간은 비교적 어둡고 안정적이다.

창밖은 더 밝고 멀리 열려 있다.

그래서 화면을 보면 한쪽에는 인물의 존재감이 강하게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풍경이 숨을 쉬는 듯한 균형이 생긴다.

만약 뒤쪽이 모두 막힌 벽이었다면 인물은 훨씬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반대로 창이 너무 크다면 풍경과 인물이 서로 경쟁했을 것이다.

뒤러는 풍경을 작게 남겨두었다.

보이지만 주인공이 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가 절묘하다.


화면의 글씨도 그림의 일부다


이제 다시 위쪽을 살펴보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뒤러는 작품 안에 제작 연도와 자신의 나이에 관한 정보를 남겼다.

자화상에서 이런 글씨는 단순한 설명표와 다르다.

그림 밖에 붙은 미술관 캡션이 아니라 

화가 자신이 화면 안에 넣은 기록이다.

그래서 얼굴을 보는 경험과 글씨를 읽는 경험이 함께 이루어진다.

‘1498년의 나.’

‘스물여섯 살의 나.’

뒤러가 자신의 현재 모습을 특정한 시간에 고정해 놓았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자화상은 원래 시간과 밀접한 그림이다.

거울 속 얼굴은 계속 변한다.

하지만 화가는 그중 한 순간을 선택해 남긴다.

뒤러는 그 순간의 나이까지 화면에 적었다.

그래서 우리는 5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이 얼굴이 정확히 어느 시기의 뒤러인지 알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화면 전체로 다시 물러나 보자.

이제 처음보다 구도가 잘 보인다.

한쪽에는 뒤러의 얼굴과 상반신이 크게 자리한다.

다른 한쪽에는 창과 풍경이 있다.

두 부분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인물이 있는 쪽은 가깝다.

풍경이 있는 쪽은 멀다.

인물 쪽에는 머리카락과 피부, 천과 장갑처럼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이 몰려 있다.

풍경 쪽은 작고 희미하며 거리감이 크다.

이 대비가 화면을 움직이게 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사람을 본다.

그다음 옷을 본다.

손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창을 발견한다.

그리고 잠깐 먼 풍경을 바라본 뒤 결국 다시 얼굴로 돌아온다.

그림의 주인공은 끝까지 뒤러다.


1500년 자화상과 나란히 보면 더 잘 보이는 것


56편에서 보았던 1500년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잠깐 떠올려보자.

두 작품 사이에는 불과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화면의 느낌은 크게 다르다.

1498년 프라도 자화상에는 몸의 방향이 있고, 옷의 화려함이 있고, 

장갑 낀 손이 있으며, 옆으로 열리는 창과 풍경이 있다.

공간도 여러 층으로 나뉜다.

반면 1500년 자화상에서는 인물이 거의 완전히 정면으로 돌아선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얼굴과 머리카락, 모피가 강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1498년 그림을 볼 때 1500년 작품의 강렬함을 거꾸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모피 코트입은 뒤러의 자화상 1500
1500년 작 뒤러의 자화상


프라도의 뒤러는 훨씬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공간 안에 있다.

좋은 옷을 입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젊은 남자다.

그 차이를 알고 보면 두 작품이 

단순히 ‘젊은 뒤러의 비슷한 자화상 두 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보면 화려하고, 멀리서 보면 침착하다


이 작품의 재미는 가까이 볼 때와 멀리서 볼 때 조금 다르다는 데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세부가 쏟아진다.

머리카락의 굴곡이 보인다.

피부와 수염이 다르다.

흰 셔츠와 겉옷의 재질이 다르고 장갑의 표면도 다르다.

창밖에는 아주 작은 풍경까지 있다.

그런데 몇 걸음 물러나 전체를 보면 그렇게 복잡한 그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하다.

한 사람의 얼굴이 중심을 잡고 있고, 손과 옷이 아래를 받친다. 

창은 옆에서 공간을 열어준다.

세부는 많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뒤러의 정교함이 단순히 ‘아주 자세히 그렸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수많은 세부를 넣으면서도 결국 우리가 한 사람을 보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다시 눈을 보게 된다


이제 그림 앞에서 처음 섰던 자리로 돌아가 보자.

창밖의 산도 봤다.

장갑도 봤다.

옷의 여러 겹과 머리카락도 살펴봤다.

그런데 마지막에 시선이 돌아오는 곳은 결국 얼굴이다.

특히 눈이다.

그 눈은 처음부터 같은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그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뒤러는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작은 자화상이 이상할 만큼 오래 기억된다.

화려한 사건도 없다.

종교적 기적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여러 인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없다.

한 젊은 남자가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얼굴을 보여주고, 좋은 옷을 보여주고, 장갑 낀 손을 화면 안에 놓는다. 

자신의 나이와 그림을 그린 해까지 기록한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본다.

1498년, 스물여섯 살의 알브레히트 뒤러다.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만난다면 처음부터 모든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먼저 그의 눈을 보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자.

옷의 표면을 보고 장갑 낀 손에서 잠시 멈춘다.

그다음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작은 창을 찾고, 창 너머 먼 풍경까지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얼굴로 돌아오면 된다.

그때 처음 보았던 얼굴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한 바퀴 그림을 돌아보는 동안, 

뒤러는 500년 전 그 자리에서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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