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만나면 먼저
한 가지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림 속 젊은 남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15세기 말 화가의 모습과 꽤 다르다.
작업복을 입고 붓을 든 장인도 아니다.
누군가의 초상화 한쪽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끼워 넣은 화가도 아니다.
좋은 옷을 입었다. 장갑도 꼈다. 자세에는 여유가 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왕자도 귀족도 아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스물여섯 살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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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브레히트 뒤러의 1498년 자화상, 프라도 미술관 |
1498년, 뒤러는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그렸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화상》은 한 젊은 화가의 얼굴을
기록한 그림에서 끝나지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라는 직업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된다.
1498년, 유럽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뒤러가 이 자화상을 그린 1498년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유럽의 거대한 변화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불과 6년이 지났고,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는 바로 그해 인도 항로를 열었다.
유럽인이 알고 있던 세계의 크기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었다.
지식이 퍼지는 방식도 달라졌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등장한 뒤 책과 인쇄물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성경과 고전 문헌뿐 아니라 그림과 이미지 역시 판화를 통해 국경을 넘어 이동했다.
이 변화는 뒤러에게 특별히 중요했다.
뒤러는 회화뿐 아니라 목판화와 동판화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화가였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걸려 있는 한 점의 그림과 달리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
다른 도시와 다른 나라로 보낼 수 있었다.
뒤러의 그림을 직접 본 적 없는 사람도
그의 이미지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뒤러는 이 새로운 환경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
뒤러가 태어나고 활동한 곳은 뉘른베르크였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도 중요한 자유제국도시였다.
황제나 지역 영주의 궁정에 종속된 작은 도시가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 국제 교역이 활발한 도시였다.
상인과 장인들이 모였고 금속공예와 인쇄업도 발전했다.
책과 판화가 만들어지고 지식인과 상인들이 새로운 정보를 교환했다.
뒤러가 이런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꽤 중요하다.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였다.
어린 뒤러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공방에서 금세공 기술을 배웠다.
금속을 정밀하게 다루고 작은 형태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뒤러는 결국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뉘른베르크의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의 공방에 들어가
회화와 목판화 제작을 배웠다.
오늘날처럼 미술대학에 들어가 개인적인 창작 세계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었다.
공방에서 스승에게 기술을 배우고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화가가 되는 일반적인 길이었다.
즉 뒤러는 처음부터 ‘천재 예술가’로 출발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인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1498년의 《자화상》이 더욱 재미있어진다.
화가는 예술가였을까, 장인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화가를 자연스럽게 ‘예술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뒤러가 살던 시대에는 이 말이 지금과 똑같은 의미를 갖지 않았다.
회화는 손으로 제작하는 일이었다.
화가는 안료를 준비하고 나무판이나 캔버스를 다루며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화가와 다른 숙련 장인 사이의 경계가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을 단순히 손재주만 필요한 기술로 보지 않고
수학,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 고전 문학과 연결된 지적인 활동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같은 인물은 회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했고,
화가는 자연을 관찰하고 공간을 계산하며 인간의 몸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했다.
화가의 손만큼 화가의 머리가 중요해지고 있었다.
뒤러는 이 변화를 멀리서 듣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알프스를 넘었다.
이탈리아에서 본 새로운 예술가의 세계
뒤러는 젊은 시절 여러 지역을 여행했고
1490년대 중반에는 북이탈리아를 경험했다.
그에게 이탈리아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알프스 남쪽에는 자신이 뉘른베르크에서 배운 것과 다른 미술의 세계가 있었다.
북유럽 미술은 사물의 표면과 질감을 놀라울 만큼
세밀하게 관찰하는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머리카락 한 올, 천의 표면, 금속의 반짝임, 피부의 주름과
자연의 작은 식물까지 집요하게 바라봤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은 또 다른 문제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어떤 비례를 갖는가.
평평한 화면에서 어떻게 깊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아름다움에 법칙이 존재하는가.
뒤러는 이런 질문에 강하게 끌렸다.
훗날 그가 인체 비례와 기하학, 원근법에 관한
연구와 저술까지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림을 이루는 원리를 알고 싶어 했다.
이 점에서 뒤러는 북유럽의 장인 전통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을 연결하는 독특한 위치에 서게 된다.
1498년의 《자화상》은 바로 이런 경험을 거친 뒤에 그려졌다.
스물여섯 살, 이미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뒤러에게 자화상은 갑자기 등장한 주제가 아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1484년, 겨우 열세 살 무렵에 은필로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다.
뒤러 자신이 어린 시절의 작품임을 기록해 놓은 그림이다.
1493년에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1498년 프라도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세 작품을 이어서 보면 단순히 얼굴이 나이 들어가는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1498년의 뒤러는 이미 독립적인 화가다.
결혼했고 공방을 운영하며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화가가 되기 위해 배우는 소년이 아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서고 있는 젊은 예술가다.
그런 시점에 자신의 모습을 다시 그렸다.
작품에는 1498년이라는 연도와 자신의 나이를 알리는 문구까지 적었다.
스물여섯 살의 자신을 후대에 남기려는 의식이 분명하다.
왜 하필 자기 얼굴이었을까
자화상은 오늘날 너무 익숙하다.
사진을 찍고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에 올리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얼굴을 이미지로 남기는 행동 자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15세기 말에는 상황이 달랐다.
초상화는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왕과 귀족, 부유한 상인처럼 자신의 모습을 남길
경제력과 사회적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독립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화가가 종교화나 집단 초상 속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만을 독립적인 작품의 중심에 놓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뒤러는 자기 자신을 그릴 가치가 있는 존재로 바라봤다.
이것은 단순한 허영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변화다.
화가가 자신의 개인성과 사회적 정체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주문을 수행하는 익명의 장인에서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화가다’
그래서 프라도의 《자화상》은 단순한 얼굴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
뒤러는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붓과 팔레트를 들고 “나는 화가다”라고 설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자신을 세련된 젊은 신사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프라도 미술관은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갑을 뒤러가 표현하려 했던
사회적 지위와 연결해서 설명한다.
당시 고급 장갑은 단순히 손을 보호하기 위한 생활용품만은 아니었다.
신분과 세련된 생활방식을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손으로 일하는 화가가 자신의 손을
장갑으로 감싸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물론 이것을 하나의 상징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뒤러가 자신을 작업장의 장인처럼
보이게 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직업의 현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회적 모습이다.
그림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며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름을 가진 화가
뒤러의 시대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작품과 함께 화가의 이름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뒤러는 판화에 자신의 유명한 ‘AD’ 모노그램을 사용했다.
A 아래에 D가 들어간 간결한 표식이다.
이 표식은 점차 그의 작품을 알아보게 하는 일종의 표시가 되었다.
판화가 여러 도시로 퍼지면서 뒤러의 이미지와 함께 그의 이름도 이동했다.
이 점에서 뒤러는 근대적인 의미의 예술가 명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왕실이나 특정 교회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이 넓은 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작품과 화가의 이름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런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반복해서 남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작품뿐 아니라 ‘뒤러라는 사람’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고 있었다.
북유럽 르네상스라는 또 하나의 르네상스
뒤러를 이해할 때 르네상스를 이탈리아만의 이야기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피렌체와 로마, 베네치아에서 일어난 변화가 매우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알프스 북쪽에서도 독자적인 르네상스 문화가 성장했다.
독일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화가들은 현실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 뛰어났다.
천의 질감, 피부, 식물, 금속, 유리, 풍경 같은 요소를 놀라운 정밀함으로 묘사했다.
뒤러는 이 북유럽 전통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비례와 공간,
고전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두 세계가 만난다.
북유럽의 눈과 이탈리아의 질문이 함께 존재한다.
그가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 이유도
단순히 독일에서 유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유럽 미술의 서로 다른 전통을 연결하면서 화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까지 확장했기 때문이다.
2년 뒤, 자화상은 더 대담해진다
1498년 프라도의 자화상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2년 뒤의 작품이 떠오른다.
1500년에 뒤러가 그린 정면 자화상이다.
현재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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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 모피 코트 자화상 |
그 작품에서 뒤러는 거의 완벽한 정면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당시 정면성은 그리스도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오랫동안 뒤러의 강한 예술가 의식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해석되어 왔다.
다만 뒤러가 자신을 곧바로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고 단순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이
얼마나 대담해졌는가 하는 점이다.
1498년 프라도의 자화상에서는 성공한 젊은 신사의 모습이 앞에 나온다.
1500년에는 화가라는 존재와 창조성에 대한 훨씬 더 강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그 사이에 프라도의 그림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뒤러의 자화상 연작에서 중요한 중간 지점이다.
소년이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던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리고 아직 1500년의 강렬한 정면 자화상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스물여섯 살의 뒤러는 지금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서고 싶은지를 보여주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자화상이 영국 왕의 것이 되다
이 그림의 여행도 뒤러의 명성만큼이나 국제적이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오늘날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이 자화상은 영국 왕 찰스 1세의 컬렉션에 들어가 있었다.
찰스 1세는 유럽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한 군주였다.
그의 컬렉션에는 티치아노, 라파엘로를 비롯한 여러 거장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 내전은 왕의 운명을 바꾸었다.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되었고
이후 왕실 컬렉션도 매각되어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뒤러의 《자화상》도 이 과정에서 이동했다.
작품은 데이비드 머리의 소유가 되었고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1654년에는 스페인의 유력 정치가 루이스 데 아로가
펠리페 4세에게 이 그림을 증정했다.
이때부터 뒤러의 얼굴은 스페인 왕실 컬렉션의 일부가 된다.
훗날 왕실 컬렉션을 기반으로 프라도 미술관이 형성되면서
이 작품 역시 오늘날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한 독일 화가가 스물여섯 살에 그린 자신의 얼굴이
영국 왕실을 거쳐 스페인 왕실에 들어갔다는 사실만 보아도
뒤러의 명성이 얼마나 넓은 지역으로 퍼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화가가 자기 자신에게 준 자리
1498년의 뒤러는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
그가 훗날 유럽 미술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 될지 당시에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뒤러 자신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화가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만
머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의 지식을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다른 나라의 미술을 배우고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자체를 한 점의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만났을 때 “뒤러가 젊었을 때 이렇게 생겼구나”
라고만 보고 지나치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 셈이다.
그 얼굴 뒤에는 15세기 말 유럽의 변화가 있다.
상업도시 뉘른베르크가 있고, 인쇄와 판화의 확산이 있으며,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 르네상스와의 만남이 있다.
무엇보다 장인과 예술가 사이의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대가 있다.
뒤러는 그 변화에 대해 글로 선언문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왕관도 없고 작위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그림의 중심에 놓았다.
그 선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언이었다.
화가도 자기 얼굴과 자기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선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