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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아힘 파티니르 작 《스틱스강을 건너는 카론》 |
처음 이 그림 앞에 서면 지옥보다 물이 먼저 보인다.
화면 한가운데를 넓고 푸른 물이 차지하고 있다.
하늘도 밝다. 왼쪽에는 숲과 초원이 펼쳐지고,
오른쪽 아래에도 푸른 나무와 풀밭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넓은 물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배에는 두 존재가 타고 있다.
한 명은 카론이다.
다른 한 명은 이제 자신의 마지막 목적지로 건너가야 하는 인간의 영혼이다.
이번에는 그 작은 배에서 출발해보자.
넓은 풍경 한가운데 작은 배 한 척
먼저 그림 전체를 조금 떨어져서 본다.
파티니르는 카론을 화면 가득 크게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하늘과 물, 숲과 먼 산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카론의 배는
그 한가운데 아주 작게 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은 결국 배를 찾아간다.
이유가 있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뻗어 나온 육지는 가운데에서 갈라지고,
넓은 물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곳에 배가 놓여 있다.
색도 역할을 한다.
왼쪽의 숲은 짙은 초록색이고 오른쪽 위는 검은 연기와 불길 때문에 어둡다.
그 사이를 차갑고 맑은 청록색 물이 넓게 가른다.
배는 바로 그 경계에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의 중심은 단순히 카론이라는 인물이 아니다.
선택을 앞둔 공간 자체가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카론을 가까이에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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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론과 배에 탄 영혼 |
이제 화면 한가운데의 작은 배를 확대해보자.
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늙은 남자의 모습이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희끗하고 몸에는 옷을 거의 걸치지 않았다.
흰 천이 몸 뒤쪽에서 휘날린다.
두 손으로 긴 노를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한쪽 다리는 앞으로 나와 있고 다른 다리는 뒤에서 몸을 받친다.
작은 배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노를 젓는 자세다.
배도 화려하지 않다.
장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작은 나무배다.
그런데 카론의 발 아래를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창백하고 벌거벗은 작은 인물이다.
바로 죽은 인간의 영혼이다.
이 영혼은 카론보다 훨씬 작게 그려졌다.
배 바닥에 낮게 웅크리고 있어 전체 그림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 차이가 재미있다.
그림의 제목에는 카론이 등장하지만,
이 여행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존재는 카론이 아니다.
카론은 그저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이다.
어디에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그의 발 아래 웅크린 작은 영혼이다.
그런데 배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여기서 배의 방향을 보자.
카론의 몸만 보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순간 헷갈릴 수 있다.
그래서 인물보다 배의 뱃머리와 물 위의 위치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배는 화면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을 바라보면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이라면 당연히 처음부터
불과 괴물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물가에는 푸른 풀과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매가 달린 나무도 보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그림은 재미있다.
보기 좋은 곳이 반드시 좋은 곳은 아니다.
오른쪽 아래부터 천천히 올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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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 입구와 푸른 숲 |
오른쪽 아래만 따로 보면 꽤 아름답다.
물은 푸르다.
강가에는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앞쪽의 큰 나무에는 둥근 열매들이 가득 달려 있다.
숲 사이에는 작은 새들도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동물도 있다.
전체 그림에서 이 부분만 잘라 보여준다면 누군가는 이곳을 낙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선을 위로 조금만 올려보자.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진다.
푸른 숲 뒤로 커다란 어두운 건축물이 나타난다.
입구는 새까맣다.
그 옆에는 기괴한 생물이 웅크리고 있다.
사자의 몸을 연상시키는 괴물이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듯 보인다.
건물 위와 주변에도 작은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면 풍경은 완전히 바뀐다.
아름다운 숲 뒤에서 지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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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과 연기로 뒤덮인 지옥 |
오른쪽 위로 시선을 올리면 색부터 달라진다.
푸른 하늘이 사라진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그 아래에서 붉은 불길이 솟아오른다.
땅도 검게 변한다.
작은 인간과 기괴한 존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어떤 인물들은 괴물에게 쫓기거나 공격당하는 듯하고, 멀리서는 불길이 계속 치솟는다.
파티니르는 지옥을 화면 전체가 불타는 붉은 세계로만 그리지 않았다.
바로 앞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풀을 놓고, 그 뒤에 어둠과 불길을 숨겨두었다.
그래서 관람자는 처음에는 속기 쉽다.
가까이 있는 것만 보면 오른쪽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눈을 조금 더 깊숙이 보내는 순간 알게 된다.
이 길의 끝에는 불이 있다.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가보자
이제 카론의 배를 지나 화면 왼쪽으로 눈을 옮겨보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는 불길이 없다.
짙은 초록색 숲 사이로 푸른 물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놓여 있다.
나무에는 열매가 맺혀 있다.
초원에는 동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새들도 보인다.
하지만 이곳 역시 아무 설명 없이 보면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 풍경처럼 보인다.
그래서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한다.
천사는 아주 작게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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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들이 있는 낙원 풍경 |
왼쪽 아래쪽 물가를 따라가 보면 날개 달린 존재들이 보인다.
천사들이다.
한 천사는 물가 가까운 언덕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조금 더 안쪽 숲 사이에는 또 다른 천사가 작은 인간과 함께 있다.
멀리에도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이 천사들은 그림의 주인공처럼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
파티니르는 낙원을 설명하기 위해 거대한 천사를 화면 가운데 세우지 않았다.
관람자가 숲을 따라 천천히 찾아가야 한다.
그 때문에 이곳은 오른쪽의 지옥보다 훨씬 조용하다.
소리 없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아주 먼 곳에 있는 흰 건물
왼쪽 풍경에서 시선을 계속 뒤쪽으로 보내보자.
숲이 끝나고 푸른 언덕이 나타난다.
그 너머에는 아주 작은 도시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흰 건축물이 하나 있다.
둥근 돔처럼 솟아 있다.
전체 그림에서는 손톱보다도 작게 보이는 부분이다.
파티니르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갈수록 색을 점점 푸르게 만들었다.
앞쪽의 나무는 짙은 초록색이다.
조금 뒤로 가면 청록색이 섞인다.
더 멀리 있는 언덕은 거의 푸른색이 된다.
마지막에는 하늘과 산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이렇게 멀어질수록 색을 푸르고 흐리게 만들어 공
간의 깊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흔히 대기원근법이라고 부른다.
용어는 몰라도 괜찮다.
그림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왼쪽 아래의 나무에서 출발해 저 멀리 푸른 산까지 눈을 보내보면
화면이 실제보다 훨씬 깊게 느껴진다.
파티니르가 풍경을 잘 그린 화가로 이름을 얻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보인다.
왼쪽과 오른쪽은 색으로도 갈라진다
이제 그림 전체를 다시 보자.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는 천사와 괴물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색 자체가 다르다.
왼쪽에는 푸른색과 초록색이 넓게 퍼져 있다.
하늘도 밝다.
물길은 부드럽게 굽어 있고 숲과 초원이 이어진다.
반대로 오른쪽 위로 갈수록 검정과 짙은 갈색, 붉은색이 강해진다.
연기는 하늘을 덮고 불길이 어둠 속에서 번쩍인다.
그런데 경계가 칼로 자른 것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오른쪽 아래에도 아름다운 초록색이 남아 있다.
이게 중요하다.
파티니르는 선과 악을 어린이 그림책처럼 색깔 두 개로 완전히 갈라놓지 않았다.
관람자가 직접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판단하게 만든다.
가장 작은 인물이 가장 중요한 이유
다시 배로 돌아가자.
화면에는 산도 있고 숲도 있고 건물도 있고 천사와 괴물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풍경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배 바닥의 작은 영혼이다.
그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카론의 발 아래 웅크린 채 배에 실려 간다.
그래서 이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이상한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거대한 풍경을 내려다보는 관람자였는데,
어느 순간 배에 탄 작은 영혼의 입장에서 양쪽을 바라보게 된다.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하지만 그림 속 영혼에게는 이제 선택할 시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배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아름다운 것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오래 남는 부분은 오른쪽 아래다.
왜 파티니르는 지옥으로 이어지는 곳에 아름다운 나무와 풀을 그렸을까.
그냥 처음부터 검은 땅과 불길을 그렸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인간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나쁜 길이 언제나 처음부터 나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앞에서는 더 편하고 더 아름답고 더 쉽게 다가올 수도 있다.
반대로 좋은 길은 당장 화려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풍경 자체가 유혹이고 선택이다.
관람자는 카론의 배와 함께 그 사이를 지나간다.
마지막에는 다시 물을 보자
이제 세부를 충분히 봤으니 마지막으로 그림에서 조금 물러나자.
그러면 다시 넓은 청록색 물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에는 조용한 숲이 있다.
오른쪽에는 아름다운 초록색 풍경 뒤로 검은 연기와 불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있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그 배는 풍경 속 작은 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화면에서 가장 넓은 것은 물이고 가장 화려한 것은 풍경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영혼이다.
파티니르는 인간을 아주 작게 그렸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선택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어느 순간 카론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배에 함께 탄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눈앞에는 두 개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한쪽은 조용해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른 한쪽은 가까이에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너머에서 불길이 솟는다.
파티니르는 어느 쪽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아주 넓고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놓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작은 배를 띄운다.
그래서 《스틱스강을 건너는 카론》을 보고 나면
카론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길을 선택하는가.
파티니르가 그린 풍경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을 조용히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