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49편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세부 감상, 이 거대한 혼란을 어디서부터 봐야 할까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1563년경,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피터르 브뤼헐 작《죽음의 승리》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앞에 서면 처음에는 눈이 갈 곳을 잃는다.

사람도 많고 해골도 많다. 불이 나고, 사람들이 달아나고, 

누군가는 싸우고 있다. 한 장면을 겨우 보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 그림은 처음부터 작은 장면을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먼저 그림 전체를 한 번 보자.

화면 위쪽에는 황폐한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사람과 해골이 빽빽하게 몰려든다. 

그리고 그 수많은 장면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점점 죽음의 세계에 포위되고 있다.

이번에는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그림 안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멀리 있는 풍경부터 보자


처음에는 인물보다 화면 맨 위쪽을 보는 것이 좋다.

우리가 흔히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푸른 들판이나 

평화로운 마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땅은 메말라 있고 나무들은 앙상하다. 

화면 왼쪽 멀리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곳곳에서 불길이 솟는다.

오른쪽 먼바다도 안전하지 않다.

배들이 떠 있지만 평온한 항해의 모습이 아니다. 

일부 배는 기울어져 있고, 바다와 해안 주변에서도 파괴와 죽음이 이어진다.

화면 어디를 보아도 도망쳐 쉴 만한 장소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색도 눈여겨보자.

화면 전체를 갈색과 황토색, 탁한 붉은색이 뒤덮고 있다. 

불길의 붉은색은 따뜻한 느낌을 주기보다 

메마른 땅과 검은 연기 사이에서 불안하게 번쩍인다.

하늘조차 맑은 푸른색이 아니다.

그림 위쪽부터 이미 세상 전체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만들어진다.

이 배경을 먼저 보고 아래쪽으로 눈을 내리면 

앞에 있는 수많은 죽음이 갑자기 나타난 사건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미 먼 곳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왼쪽에서 죽음이 쏟아져 나온다


두개골을 가득 실은 수레와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는 해골들
두개골 수레와 해골들


이제 화면 왼쪽으로 시선을 내려보자.

멀리 있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진다.

땅에는 해골과 시체가 뒤엉켜 있고, 

해골들은 무덤에서 나온 듯 끊임없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밀려든다. 

죽음은 한 명이 아니다. 숫자를 셀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 브뤼헐이 무섭게 만든 것은 해골의 생김새만이 아니다.

오히려 해골들이 너무나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 더 섬뜩하다.

어떤 해골은 사람을 공격하고, 어떤 해골은 사람을 끌고 간다. 

다른 해골들은 마치 군대처럼 무리를 이루어 전진한다.

화면 위쪽에서는 종도 울린다.

죽음이 몰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전체에 이제 시간이 끝났다고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아래에는 해골이 가득 실린 수레도 지나간다. 

수레 위에 쌓여 있는 것은 곡식이나 물건이 아니라 해골들이다.

이 그림에서 죽음은 한 사람씩 조용히 찾아오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군대가 되었다.


가운데 말을 탄 죽음을 찾아보자


낫을 든 해골과 쓰러지고 달아나는 사람들
낫을 든 해골과 사람들


수많은 해골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화면 중앙 부근에는 

이 혼란을 이끄는 존재가 있다.

붉은빛이 도는 야윈 말을 탄 해골이다.

긴 낫을 들고 있다.

주변에 워낙 많은 사건이 벌어져 있어서 

처음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 주인공처럼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치를 찾고 나면 이 해골이 다른 해골들과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앞으로 달려가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낫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래 낫은 농부가 풀이나 곡식을 베는 도구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죽음이 그것을 들었다.

사람이 곡식을 베어 쓰러뜨리듯 죽음이 인간을 베어버리는 이미지가 겹쳐진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주변이다.

누군가는 맞서 싸우고 누군가는 도망친다. 

하지만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브뤼헐은 영웅 한 명과 죽음이 맞서는 극적인 결투를 그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상황 전체를 바꿀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화면 가운데를 보고 있으면 

싸움이라기보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장면처럼 느껴진다.


오른쪽의 거대한 상자, 사람들은 어디로 들어가는가


이제 시선을 오른쪽 가운데로 옮겨보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느 곳으로 밀려가고 있다.

처음에는 성문이나 커다란 건물 입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대한 관을 연상시키는 죽음의 함정이다. 

열린 문 안쪽에는 커다란 붉은 십자가가 보인다.

사람들은 그 안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는 죽음이 몰아붙이고 앞에서는 해골들이 기다린다.

특히 입구 주변의 해골들을 보자.

무장을 하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들이 방패처럼 들고 있는 검은 판들은 관의 뚜껑을 연상시킨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한꺼번에 그곳으로 밀려 들어간다.

누구 한 명을 위한 관이 아니다.

세상 전체가 들어갈 만큼 커진 무덤처럼 보인다.

이 부분을 보고 다시 화면 전체를 바라보면 브뤼헐의 구도가 조금씩 읽힌다.

그림 곳곳에 흩어져 있던 혼란이 결국 오른쪽을 향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마련한 출구 없는 장소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왕에게도 남은 시간은 없다


이제 화면 맨 아래 왼쪽으로 내려가 보자.

여기에는 왕으로 보이는 인물이 쓰러져 있다.

왕관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바로 옆에는 금화가 가득한 통이 놓여 있다.

그런데 해골 하나가 그 금화를 손에 넣고 있다.

왕이 평생 쌓았을 재산이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해골이다. 

왕에게 모래시계를 보여준다.

모래시계는 시간을 재는 물건이다.

여기서는 설명이 길 필요가 없다.

왕에게 남아 있던 시간이 다 되었다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왕관도 있고 돈도 있다.

그러나 시간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브뤼헐은 이것을 화면 한가운데 크게 그리지 않았다. 

왼쪽 아래 작은 장면 속에 넣었다.

그래서 관람자가 직접 발견하게 만든다.

그리고 발견하는 순간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그림에서 왕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받지 못한다.


쓰러진 왕에게 모래시계를 내미는 해골. 곁에서는 또 다른 해골이 왕의 재물을 가져간다
왕과 모래시계를 든 해골


식탁도 놀이도 한순간에 끝난다


이번에는 화면 오른쪽 아래를 보자.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겼을 법한 공간이 엉망이 되어 있다.

식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고, 카드와 놀이판 같은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다. 

한 남자는 칼을 뽑아 해골에게 맞서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그림에서 인간이 죽음을 이기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브뤼헐이 일부러 잔치와 놀이가 있던 곳에 죽음을 들여보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음식이 있고 술이 있고 놀이가 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이 계속될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골들이 그 한가운데 들어왔다.

탁자는 뒤집히고 놀이는 끝난다.

즐거움을 나쁘다고 꾸짖는 장면이라고 단순하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간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일상이 얼마나 쉽게 끊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밀려오는 해골 군대와 그들에게 포위된 사람들
해골 군대에 포위된 사람들


그런데 오른쪽 아래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도 음악을 이어가는 연인. 뒤에서는 해골도 악기를 연주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연인과 해골


이제 마지막으로 그림 맨 오른쪽 아래를 보자.

이곳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다르다.

젊은 남녀가 나란히 있다.

여자는 류트를 연주하고 있고 남자는 악보를 들고 노래하는 듯하다. 

화면 전체가 비명과 폭력으로 가득한데 두 사람만 자신들의 음악 속에 머물러 있다.

주변의 소란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은 장면이 그림 속 유일한 피난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바로 뒤를 보자.

해골 하나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음악에 죽음이 이미 끼어든 것이다.

이 장면이 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음은 언제나 칼과 낫을 들고 덤벼드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아주 가까이 와 있는데도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프라도 미술관도 이 연인을 아직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 밖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두 사람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화면을 보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


다시 멀리서 전체를 보자


이제 한 번 뒤로 물러나 그림 전체를 다시 보자.

처음에는 수백 개의 장면이 뒤죽박죽 섞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나씩 보고 나면 조금 달라진다.

멀리서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

죽음의 군대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밀려온다.

가운데에서는 말을 탄 죽음이 낫을 들고 사람들을 몰아간다.

오른쪽에서는 사람들이 거대한 죽음의 함정 속으로 들어간다.

왼쪽 아래의 왕은 돈과 권력을 잃고, 오른쪽 아래에서는 잔치와 놀이가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서는 두 연인이 아직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브뤼헐은 한 사람의 죽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왕의 죽음도, 군인의 죽음도, 농민의 죽음도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돈이 있는 사람도 죽고, 싸우는 사람도 죽고, 도망치는 사람도 죽는다. 즐기던 사람도 죽고 사랑하던 사람에게도 죽음은 찾아온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해골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사람마다 죽음을 만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싸운다.

누군가는 달아난다.

누군가는 재산을 빼앗긴다.

누군가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과는 같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죽음의 승리》라는 말이 조금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림을 끝까지 보고 나면 그렇지 않다.

브뤼헐은 화면 어디에도 인간이 빠져나갈 틈을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마지막에 다시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

오른쪽 아래의 작은 연인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있고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장면을 희망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프라도의 설명처럼 그들 역시 결국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 전체가 죽음으로 가득한 가운데 브뤼헐이 마지막 구석에 

남겨놓은 것이 사랑과 음악이라는 사실은 오래 눈에 남는다.

그래서 《죽음의 승리》 앞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그 순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브뤼헐은 그것까지 그림 안에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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