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어디를 봐야 할지 막막해지는 그림이 있다.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다.
117×162센티미터의 목판 위에 수많은 인간과 해골이 뒤엉켜 있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그 안으로 아직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해골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화면 구석에 어떤 장면이 숨어 있는지는 다음에 천천히 볼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16세기의 화가는 왜 세상 전체가 죽음에 휩쓸리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그 화가는 왜 피터르 브뤼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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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르 브뤼헐 작《죽음의 승리》 |
농민 화가라는 이름 뒤의 브뤼헐
피터르 브뤼헐, 흔히 피터르 브뤼헐 1세 또는 대(大) 브뤼헐이라고 부르는
화가는 16세기 북유럽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부터 정확하게 확정되어 있지는 않다.
프라도 미술관은 그를 약 1525년경 태어나 1569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화가로 소개한다.
그의 생애에서 비교적 분명한 기록 가운데 하나는
1551년 안트베르펜의 성 루가 길드에 등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성 루가 길드는 당시 화가와 미술 관련 장인들이 활동하기 위해
중요했던 직업 조직이었다.
이 기록을 통해 적어도 이 무렵 브뤼헐이
독립적인 화가로 활동할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인 1552년 무렵에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북유럽 화가가 이탈리아로 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를 직접 보고 고대 유적과 새로운 회화의 성과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뤼헐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이탈리아 화가를
그대로 닮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농부가 일하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춤추고,
사냥하고, 넘어지고, 싸우는 세계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브뤼헐에게는 ‘농민 화가’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 브뤼헐을 이해하면 그의 그림을 너무 단순하게 보게 된다.
브뤼헐의 그림에는 인간 사회를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한 사람의 영웅을 크게 세우기보다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바라본다.
그러면 처음에는 제각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인간 사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죽음의 승리》에서도 바로 그 시선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죽음이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던 세계
《죽음의 승리》는 1562~1563년경 제작된 것으로 본다.
16세기 유럽이라고 하면 흔히 르네상스부터 떠올린다.
인간의 발견, 고대 문화의 부활, 과학과 지식의 발전 같은 밝은 말들이 먼저 생각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실제 삶이 언제나 밝았던 것은 아니다.
유럽 사회에는 전염병의 기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14세기의 흑사병은 유럽인의 죽음에 대한 감각을 크게 바꾸어놓았고,
이후에도 전염병은 반복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위협했다.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종교 문제까지 겹쳤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의 오랜 종교적 질서는 크게 흔들렸다.
가톨릭과 새로운 개신교 세력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 논쟁에 머물지 않았다.
정치와 권력, 지역 공동체의 갈등과 연결되면서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브뤼헐이 활동했던 네덜란드 지역 역시 이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저지대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지배 아래 있었고,
종교적 긴장과 정치적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만 《죽음의 승리》를 특정 전쟁이나 특정 정치 사건 하나를
직접 묘사한 그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브뤼헐은 신문 보도처럼 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현실에서 반복해서 경험했던 전쟁, 질병, 폭력, 불안과
죽음의 기억이 훨씬 오래된 ‘죽음의 이미지’와 만나는 그림에 가깝다.
중세 사람들은 왜 죽음을 그렸을까
《죽음의 승리》를 이해하려면 브뤼헐보다 더 오래된 시대로 잠시 돌아가야 한다.
중세 유럽에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신분이 높든 낮든, 돈이 많든 적든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생각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중세 후기에는 이 생각이 ‘죽음의 춤’,
즉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라고 불리는 이미지 전통으로 발전했다.
왕도 죽는다.
성직자도 죽는다.
부자도 죽는다.
군인도 농민도 죽는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차례로 이끌고 가는 모습이
벽화나 판화, 문학 등에 등장했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죽음의 승리》를 설명하면서
이 작품을 중세 문학과 북유럽 미술에서 이어져 온 죽음의 춤 전통과 연결한다.
브뤼헐은 이미 존재하던 이 전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몇 사람을 데려가는 죽음을 보여주는 정도를 넘어,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계 전체가 죽음의 힘 앞에서
무너지는 거대한 장면으로 주제를 확대했다.
그래서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승리’다.
죽음이 찾아온 정도가 아니다.
죽음이 이긴 세계다.
보스 이후의 북유럽에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또 한 명의 화가가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다.
보스는 브뤼헐보다 앞선 세대의 북유럽 화가였고,
인간의 죄와 유혹, 지옥과 괴물, 기괴한 상상력을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화면에 펼쳐놓았다.
브뤼헐이 보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죽음의 승리》에서 보스의 영향과
북유럽의 죽음 이미지 전통을 함께 언급한다.
하지만 두 화가를 같은 사람처럼 볼 필요는 없다.
브뤼헐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는 인간을 아주 가까이에서 영웅적으로 바라보기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를 즐겨 사용했다.
수많은 작은 사건을 한 화면에 넣고, 각각의 사건이 모여 더 큰 의미를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는 한 장면만 보고 끝내기 어렵다.
눈이 계속 움직인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앞에서 뒤로 이동하면서 작은 인간들의 행동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르네상스 시대에 남아 있던 중세의 죽음
여기에서 《죽음의 승리》가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 그림은 중세에 제작된 작품이 아니다.
1562~1563년경이면 이미 르네상스가 유럽 전역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시기다.
그런데 브뤼헐은 죽음의 춤이나 죽음의 보편성처럼 중세에서
발전한 오래된 주제를 다시 불러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인간의 두려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인간의 능력을 발견한 시대였다면,
브뤼헐은 동시에 그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도 바라봤다.
권력도 재산도 신분도 인간을 영원하게 만들지 못한다.
종교적인 경건함조차 죽음 그 자체를 피하게 해주는 수단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작품을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죽음의 승리를 보여주는
도덕적 성격의 작품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죽음의 승리》를 단순히 무서운 그림이나
기괴한 상상화로만 보면 브뤼헐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그림이 묻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문제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브뤼헐이 바라본 인간
브뤼헐은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노동하는 사람도 있고 놀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람도 있다.
성경 이야기를 그릴 때조차
거대한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끼워 넣곤 했다.
그렇다고 인간을 단순히 조롱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의 시선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화가는 누군가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사람만을 영웅으로 만들기보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넓게 펼쳐 보인다.
관람자는 그 세계를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죽음의 승리》에서는 그 방식이 가장 냉혹한 질문으로 바뀐다.
인간의 신분과 권력과 재산을 모두 벗겨낸다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가.
브뤼헐은 그 질문에 긴 문장을 붙이지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놓았다.
이 그림은 어떻게 프라도까지 왔을까
《죽음의 승리》의 이동 경로도 흥미롭다.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6세기 말 이탈리아 사비오네타의 공작
베스파시아노 곤차가의 컬렉션에 있었다.
이후 이사벨라 곤차가, 안나 카라파 등의 소장을 거쳐
17세기에는 메디나 데 라스 토레스 공작 라미로 누녜스 데 구스만의 컬렉션으로 들어갔다.
그 뒤 그림은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18세기에는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이사벨 파르네시오가 구입하면서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포함되었고,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소장되었다.
그리고 1827년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왔다.
오늘날 프라도에서 브뤼헐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의 승리》가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는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긴 이동의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한동안 이 작품은 스페인에 있는 브뤼헐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프라도 미술관이 2011년 《성 마르틴 축일의 포도주》를 구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수백 년 동안 그림도 늙었다
《죽음의 승리》는 목판 위에 유채로 그린 작품이다.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습도와 온도의 영향을 받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수백 년을 살아남은 목판화가
오늘날까지 처음 상태 그대로 유지되기 어려운 이유다.
《죽음의 승리》 역시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고,
이전 복원 과정에서 더해진 덧칠과 색이 들어간 바니시 때문에
원래의 색과 세부가 상당 부분 가려져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대규모 복원 작업을 진행한 뒤 2018년 그 결과를 공개했다.
목판 뒤에 붙어 움직임을 방해하던 구조물을 제거하고
판재의 균열과 변형을 안정시켰다.
회화 표면에서는 오래된 덧칠과 변색된 층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그 결과 이전에 황갈색에 가까운 어두운 화면으로 보였던 작품에서 보다
선명한 파랑과 빨강이 되살아났다. 배경의 깊이와
브뤼헐 특유의 세밀한 붓질도 훨씬 분명해졌다.
우리가 지금 프라도에서 만나는
《죽음의 승리》는 그렇게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다.
결국 죽음이 아니라 인간을 그린 그림
이제 작품 앞에 다시 서보자.
아직 해골의 행동을 하나하나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한두 걸음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브뤼헐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죽은 사람 몇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죽음의 기억, 16세기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 느꼈던 불안,
종교적 긴장과 폭력의 경험, 그리고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오래된 생각을 하나의 세계로 펼쳐놓았다.
그래서 《죽음의 승리》는 4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다.
왕도 죽는다.
부자도 죽는다.
군인도 죽는다.
평범한 사람도 죽는다.
죽음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분과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브뤼헐이 중세의 오래된 주제를 16세기에 다시 꺼내
거대한 그림으로 만든 이유도 바로 그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다.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처음 마주하면 해골부터 보인다.
하지만 조금 오래 바라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브뤼헐이 정말 집요하게 바라본 것은 해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이 모든 것을 차지한 그림인데도,
우리가 끝내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이 《죽음의 승리》가 단순한 공포의 그림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