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82편 후안 산체스 코탄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스페인에서 정물화가 하나의 세계가 되기 시작하다

스페인 정물화의 선구자 후안 산체스 코탄의 1602년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을 살펴본다. 톨레도에서 보데곤이 등장한 배경과 초기 스페인 정물화의 특징, 수도자가 된 화가의 삶까지 알아본다.

 앞서 클라라 페테르스의 정물화를 봤다면 이번 그림은 처음부터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화려한 금속잔도 없다. 유리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도 없고, 

여러 색의 꽃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도 않는다.

검은 공간 앞에 과일과 채소, 새 몇 마리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먹을거리를 그렸을 뿐인데 식탁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풍경도 아니다. 오히려 무대 위에 사물 몇 개만 남겨놓고 

주변의 소리를 모두 지워버린 것 같다.

후안 산체스 코탄이 1602년에 그린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이다. 


후안 산체스 코탄,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1602년, 캔버스에 유채, 68 × 88.2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후안 산체스 코탄 작《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그리고 제작연도 1602년은 그냥 작품 정보 하나가 아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스페인 정물화가 막 시작되던 순간

1602년이면 벨라스케스는 아직 세비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수르바란도 아직 소년이었다.

우리가 ‘스페인 황금시대 회화’라고 부르는 

17세기 스페인 미술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이다.

그런데 산체스 코탄은 이미 이때 독립된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현재 알려진 스페인의 서명과 제작연도가 있는 초기 정물화 가운데 

산체스 코탄의 작품들이 가장 이른 사례에 속하며, 

이 작품은 1602년이라는 연도와 서명이 함께 남은 스페인 최초의 정물화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 그림을 단순히 “채소를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라고 보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정물화는 너무 익숙하다.

사과 몇 개를 그려도 그림이 되고 꽃병 하나만 놓아도 작품이 된다. 하지만 1600년 무렵의 스페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종교화와 초상화, 역사와 신화를 다룬 그림이 회화의 중심에 있었다. 

음식이나 그릇 같은 일상의 물건들은 그림에 등장하더라도 대개 더 큰 이야기의 일부였다.

그런 사물들이 사람도 성인도 없는 화면을 혼자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초기 한복판에 산체스 코탄이 있었다.


이 그림이 태어난 곳은 톨레도였다

산체스 코탄은 1560년 톨레도 근처 오르가스에서 태어났다. 

프라도 자료에 따르면 그해 6월 25일 고향의 교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후 톨레도에서 생활하며 화가로 활동했다.

당시 톨레도는 스페인에서 아주 특별한 도시였다.

1561년 펠리페 2세가 왕실의 중심을 마드리드로 옮긴 뒤 

정치적 위상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톨레도는 여전히 강력한 종교 도시였고 중요한 미술 중심지였다.

산체스 코탄보다 한 세대 앞서 이곳에 자리 잡은 화가가 바로 엘 그레코였다.

그러나 산체스 코탄의 정물화를 엘 그레코의 종교화와 같은 방식으로 볼 수는 없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성인의 환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도 아니었다.

사과와 레몬, 당근과 무, 커다란 카르둔, 그리고 사냥한 새들이었다. 

프라도가 작품에서 확인하는 대상들도 바로 이것들이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산체스 코탄은 그것을 일상적인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 점이 스페인 초기 정물화의 독특한 방향을 만들어낸다.


스페인에서는 정물화를 ‘보데곤’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보데곤(bodegón)’이라는 말을 알아두면 좋다.

스페인 미술을 보다 보면 앞으로 계속 만나게 될 단어다.

오늘날에는 스페인 정물화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하지만, 

원래 ‘보데가(bodega)’와 연결되는 말로 

음식과 술이 있는 저장 공간이나 소박한 음식점 같은 의미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17세기에는 음식과 그릇, 식재료 같은 일상적 대상을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아갔다.

훗날 젊은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그린 《달걀을 부치는 노파》나 

《세비야의 물장수》 같은 작품에도 ‘보데곤’이라는 개념이 연결된다.

다만 산체스 코탄의 그림에는 사람이 없다.

음식도 조리되지 않는다.

그는 재료 자체를 화면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평범한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놓지 않는다.

정확한 위치를 정하고, 간격을 두고, 검은 공간 속에 하나씩 배치한다.

그 결과 음식은 음식이면서 동시에 형태와 빛을 관찰하기 위한 대상이 된다.


왜 이런 그림이 필요해졌을까

정물화가 등장한 이유를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유럽에서는 

자연과 일상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려는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동시에 회화를 구입하고 소장하는 시장도 확대되면서 

종교화와 초상화 이외의 그림이 독립적인 상품으로 성장할 조건이 만들어졌다.

스페인에서도 음식과 사물을 그린 그림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산체스 코탄의 경우에는 이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기록도 남아 있다.

1603년 그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작성한 목록에는 약 60점의 그림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은 종교화였고, 초상화가 11점, 정물화가 9점이었다.

이 숫자가 중요하다.

오늘날 산체스 코탄 하면 정물화를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 직업 화가로서 

그는 정물화만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화도 그렸고 초상화도 그렸다.

그럼에도 정물화가 아홉 점이나 있었다는 것은 

이 장르가 그의 작업에서 우연히 한두 번 시도한 실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구나 비슷한 구성을 반복해 제작하기도 했다.

즉 주문하고 구입하는 사람이 있었다.


스승에게서 이어진 정물화의 가능성

산체스 코탄이 아무런 전통 없이 갑자기 정물화를 발명한 것도 아니다.

프라도는 그가 화가 블라스 데 프라도에게 배웠다고 설명한다. 

블라스 데 프라도는 당시 상당한 명성을 누렸으며 특히 정물화로도 알려진 화가였다.

문제는 그의 정물화가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체스 코탄 이전 스페인 정물화의 모습을 완전하게 복원하기는 어렵다.

프라도는 이탈리아의 카를로 안토니오 프로카치니, 팜필로 누볼로네, 

특히 페데 갈리치아 같은 정물화가들도 산체스 코탄의 회화를 이해할 때 

참고할 만한 이름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산체스 코탄이 만들어낸 화면은 곧 매우 독특한 형태를 갖게 된다.

그릇과 음식으로 탁자를 가득 채우는 대신 필요한 것만 남긴다.

배경은 깊고 어둡다.

사물에는 강한 빛이 떨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대상 사이에 넓은 빈 공간을 둔다.

프라도는 이런 특징을 ‘절제’, ‘친밀함’, ‘신비로운 순수함’, ‘단순함 속의 우아함’ 같은 말들이 

초기 스페인 정물화를 설명할 때 사용되어 왔다고 정리한다. 

동시에 이것만을 유일한 ‘스페인다운 정물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스페인 정물화의 다양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이 점은 기억해두는 게 좋다.

산체스 코탄은 스페인 정물화의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모든 스페인 정물화가 그의 그림처럼 생긴 것은 아니다.


1602년, 화가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다행히 이 작품은 주문자에 관한 단서도 남아 있다.

산체스 코탄은 1603년 재산 목록을 만들면서 이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을 기록했다.

거기에는 대략 ‘자고새들이 있는 카르둔 그림’이며 

다른 그림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라는 내용과 함께 후안 데 살라사르의 소유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후안 데 살라사르는 엘 에스코리알에서 일했던 세밀화가였고 

산체스 코탄과도 관계가 있었던 인물이다. 훗날 그의 유언 집행인 역할도 맡았다. 

프라도는 이 기록을 현재의 《사냥감, 채소와 과일이 있는 정물》과 연결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정보가 하나 더 숨어 있다.

이 작품이 다른 그림들의 ‘원형’이었다는 기록이다.

산체스 코탄이 한 번 멋진 구도를 만들고 끝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물과 구성의 일부를 반복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미술관에서 ‘유일한 명작’을 보는 데 익숙하지만 

당시 작업실에서는 성공한 구도와 모티프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프라도 역시 이러한 반복 제작이 고객의 요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당시 구매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창적 이미지’라는 

개념에 반드시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에 들어간 정물화가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바로 다음 해, 산체스 코탄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긴다.

1603년이다.

그는 톨레도에서 운영하던 화가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마드리드 인근 엘 파울라르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으로 갔고, 

이후 그라나다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1627년 그라나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산체스 코탄의 정물화를 보면 쉽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검은 배경, 절제된 사물, 고요한 분위기가 수도자의 금욕적인 정신을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조심해야 한다.

이 작품은 그가 수도자가 된 뒤 그린 그림이 아니다.

1602년에 제작됐다.

그가 수도회에 들어간 것은 1603년이다. 

프라도 역시 이 그림을 산체스 코탄이 톨레도에서 직업 화가로 활동하던 

창작의 성숙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화면이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채소와 과일을 수도원적 금욕의 상징으로 읽어버리면 

제작 순서를 거꾸로 보는 셈이 된다.

물론 훗날 수도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에게 

절제와 종교적 성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 후대의 해석은 구별해야 한다.

먼저 확실한 것은 그가 사물을 극도로 제한하고 질서 있게 배열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명상으로 읽힐 수 있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카라바조보다 먼저 어둠 속에 사물을 세우다

산체스 코탄의 정물화에는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빛이다.

프라도는 검은 배경에서 강하게 떠오르는 사물과 옆에서 들어오는 빛, 

그 빛이 만드는 뚜렷한 그림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효과가 카라바조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테네브리즘, 

즉 강한 어둠 속에서 대상을 빛으로 끌어내는 표현을 선취한다고 설명한다.

다만 산체스 코탄을 단순히 ‘스페인의 카라바조’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그가 만드는 긴장은 다른 곳에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빛이 인간의 몸과 극적인 사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산체스 코탄의 화면에서는 그 강렬한 집중이 채소와 과일에 향한다.

평범한 식재료가 어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형태가 된다.

당근은 당근이지만 동시에 길게 뻗은 선이 된다.

둥근 과일은 색을 가진 구체가 된다.

거대한 카르둔은 식재료인 동시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곡선이 된다.

이런 구체적인 화면 분석은 다음 세부 감상에서 볼 부분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물화가 단순한 음식 기록을 넘어 

회화 자체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화려함이 아니라 질서로 승부한 정물화

바로 앞에서 본 클라라 페테르스와 비교하면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두 작품의 제작 시기는 불과 9년 차이다.

산체스 코탄의 작품은 1602년, 페테르스의 프라도 정물화는 1611년이다.

둘 다 정물화라는 장르가 유럽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하던 초기 단계에 속한다.

하지만 방향은 놀랄 만큼 다르다.

페테르스의 화면에는 꽃과 은도금 잔, 유리, 주석, 과자와 말린 과일이 모여 있었다. 

화가는 서로 다른 물질이 빛을 어떻게 반사하는지 보여주며 자신의 기술을 드러냈다.

산체스 코탄은 반대로 덜어낸다.

사물 사이를 비운다.

어둠을 남긴다.

그리고 각각의 물체가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거리를 둔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빈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다.

사물을 특별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리고 프라도에는 아주 늦게 들어왔다

이 작품은 오래전부터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있던 그림이 아니다.

한때 인판테 세바스티안 가브리엘 데 보르본의 컬렉션에 있었고 여러 소유자를 거친 뒤, 

프라도 미술관이 1991년 에르나니 공작의 후손에게서 구입했다. 

구입에는 마누엘 비야에스쿠사 유증 기금이 사용됐다.

프라도의 역사 전체를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입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프라도에서 스페인 정물화의 출발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됐다.

1602년이라는 이른 제작연도 때문이다.

그리고 산체스 코탄이 이후 스페인 정물화에 남긴 독특한 방식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

산체스 코탄은 왕을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에는 성모도 없고 성인도 없다.

전쟁도 없고 기적도 없다.

있는 것은 사과와 레몬, 당근과 무, 카르둔과 죽은 새들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화가는 그것들을 검은 공간 속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필요 없는 것은 없애고, 사물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옆에서 빛을 비췄다.

그러자 평범한 식재료가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산체스 코탄의 정물화를 볼 때 먼저 알아야 할 지점이다.

그는 단순히 “진짜처럼”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울지 결정했다.

어디에 놓고 얼마만큼 떨어뜨릴지도 결정했다.

정물화는 사물을 그대로 옮기는 그림이 아니라 사물을 다시 배열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그림이 되었다.

그래서 1602년의 이 조용한 그림은 스페인 회화사에서 꽤 큰 사건이다.

화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술사에서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과 하나, 당근 하나, 죽은 새 한 마리도 이제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안 산체스 코탄은 그 평범한 것들을 어둠 속에 세워,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댓글 쓰기

© 나의 세계일주.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Jago Des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