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69편 티치아노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 세부 감상, 술과 음악이 흐르는 그림을 걷다

티치아노,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 1523~1526년경, 프라도 미술관 소장. 고대 신화와 르네상스 궁정 문화가 만난 티치아노의 대표적인 신화화다.
티치아노 작《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


 앞에서는 이 그림이 태어난 시대를 보았다.

이번에는 그런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그림만 보자. 누가 주문했는지, 

르네상스가 무엇인지도 잊어도 된다.

실제 프라도 미술관에서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 앞에 섰다고 생각해보자.

이 그림은 한곳만 오래 바라보는 그림이 아니다. 

한 사람을 보다가 옆 사람에게 넘어가고, 손을 따라가다가 술잔을 만나고, 

다시 몸의 방향을 따라 화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티치아노는 축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을 그 축제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처음 전체를 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지 않는다. 

누군가는 앉아 있고, 누군가는 몸을 돌리고 있으며, 누군가는 기대고 누워 있다. 

서로 다른 자세의 몸들이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심이 어디인지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의 재미다.

티치아노는 한 명의 주인공을 화면 한가운데 세워놓고 

주변 인물들이 그를 바라보게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기 행동을 하고 있다.

축제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누군가의 명령에 맞춰 움직이는 행렬과 다르다. 

이쪽에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저쪽에서는 술을 마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음악과 취기에 몸을 맡긴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는 주인공부터 찾으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대신 사람들의 몸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그 순간 어수선해 보이던 화면에 흐름이 생긴다.


먼저 한가운데의 붉은색을 찾아보자


화면 중앙에서 가장 먼저 눈을 붙잡는 것은 강렬한 붉은색이다. 티치아노는 서로 겹치는 인물들 사이에 붉은 옷의 여성을 놓아 복잡한 화면에 시선의 중심을 만든다.
술과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화면 중앙 가까이에 붉은빛이 강한 옷을 입은 여인이 있다.

주변에는 피부색과 흰 천, 푸른색과 녹색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 붉은색은 자연스럽게 눈을 붙잡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은 정면으로 반듯하게 앉아 있지 않는다.

몸과 얼굴의 방향이 서로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 때문에 인물이 고정되어 있다기보다 

바로 조금 전 움직였거나 곧 다시 움직일 것처럼 느껴진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여성의 가슴 부분에 티치아노의 서명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인물을 티치아노와 관련된 여성 ‘비올란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정된 사실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름보다 색이다.

티치아노는 붉은색을 하나의 표지판처럼 사용한다.

복잡한 군중 속에서 눈이 길을 잃으려는 순간, 이 색이 시선을 붙잡아준다.

그리고 여기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보자.


축제를 눈으로만 듣지 말자

인물들 사이에 종이가 놓여 있다.

악보다.

그림 속 악보는 단순히 ‘음악을 상징하는 물건’ 정도로 그려놓은 것이 아니다. 

실제 음악과 연결되는 악보다. 

프라도는 여기에 적힌 카논이 페라라 궁정과 관계를 맺었던 

음악가 아드리안 빌라르트와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음악사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그림에 실제로 소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회화를 조용한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림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티치아노는 그 침묵 속에서 관람객에게 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악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입을 벌린 사람이나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화면은 조용한 야외 풍경이 아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노랫소리, 술자리의 웅성거림이 머릿속에서 생겨난다.

티치아노는 소리를 그리지 않고 소리를 만들어낸다.


손을 따라가면 술이 보인다


높이 들어 올린 술병과 잔을 건네는 손, 서로 얽힌 사람들의 몸짓이 축제의 흐름을 만든다. 아래쪽 악보까지 시선을 내리면 술과 음악이 한 장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술과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이제 사람들의 얼굴보다 손을 보자.

이 그림에는 유난히 손과 팔의 움직임이 많다.

누군가는 팔을 뻗고, 누군가는 그릇을 들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몸을 기울인다.

이런 팔들이 작은 방향표 역할을 한다.

특히 화면 왼쪽으로 눈을 옮기면 높이 들어 올린 투명한 용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안의 붉은 액체는 술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 술은 숨어 있는 상징이 아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연결하는 실제 물질처럼 존재한다.

프라도가 설명하는 이 작품의 원전에서는 안드로스 섬에 

바쿠스의 은총으로 물이 아니라 포도주가 흐른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몰라도 그림을 보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중요한 것은 티치아노가 술을 한쪽 구석의 작은 소품으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손과 입, 몸의 움직임이 모두 그것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술이 축제의 분위기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된다.


그런데 바쿠스는 어디에 있을까

제목은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술의 신 바쿠스를 찾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중심부를 살펴봐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위엄 있는 바쿠스가 주인공처럼 서 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인물을 놓친 것이 아니다.

티치아노가 그렇게 그렸다.

프라도의 작품 설명에 따르면 티치아노는 

원전에 등장하는 바쿠스와 그의 수행자들을 화면에 직접 등장시키지 않았다. 

대신 화면 깊숙한 곳의 배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이 선택은 그림의 성격을 크게 바꾼다.

신이 중심에 있었다면 우리는 신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사라지자 사람이 남는다.

술을 마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기대어 있는 사람, 취해 잠든 사람이 화면을 차지한다.

바쿠스를 그리지 않고도 화면 전체를 바쿠스의 세계로 만든 것이다.


이제 앞에서 뒤로 들어가보자


인물들 너머로 시선을 보내면 나무 사이로 하늘과 먼 바다가 열린다. 빽빽한 전경과 넓게 열린 배경의 차이가 화면에 깊이를 만든다.
인물들 너머의 바다와 하늘


여기까지 사람들만 보았다면 이번에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 화면 뒤쪽을 바라보자.

갑자기 공간이 열린다.

앞쪽의 인물들은 서로 겹쳐 있어 상당히 빽빽하다. 

반면 그 너머에는 땅과 나무, 하늘과 바다가 이어진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앞은 인간의 몸으로 가득하고 뒤는 공기로 가득하다.

티치아노는 인물들을 평평한 배경 위에 늘어놓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의 큰 몸, 조금 멀어진 사람들, 나무와 언덕, 

먼 수평선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눈이 화면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특히 푸른 하늘과 먼 바다는 앞쪽의 따뜻한 피부색과 대비된다.

사람에게 가까이 갈수록 따뜻하고 육체적이다.

멀어질수록 색은 차분해지고 공간은 넓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도 그림이 답답하게 막히지 않는다.


하늘도 그냥 파란색이 아니다

하늘을 따로 보면 재미있다.

티치아노는 하늘 전체를 균일한 파란색으로 칠하지 않았다.

흰 구름이 넓게 퍼져 있고, 구름과 푸른 하늘 사이의 밝기가 계속 달라진다. 

나뭇잎의 어두운 녹색도 그 밝은 하늘 앞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그 아래에 사람들의 피부가 있다.

푸른색, 녹색, 흰색, 붉은색, 살빛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화면 전체에서 계속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앞 편에서 이야기했던 티치아노의 색채를 실제로 보는 방법이다.

‘티치아노는 색채의 대가다’라는 말을 외울 필요가 없다.

그냥 한 가지 색을 손으로 가리킨 뒤 

비슷한 색이 어디에서 다시 나타나는지 눈으로 찾아보면 된다.

색이 화면 곳곳을 이어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자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술에 취해 잠든 여인이 길게 누워 있다. 주변의 활발한 몸짓과 대비되는 느슨한 자세가 축제 한가운데에 뜻밖의 정적을 만든다.
술에 취해 잠든 여인


그리고 마침내 이 그림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인물에게 시선이 간다.

오른쪽 아래에 거의 완전히 누운 나체의 여인이 있다.

몸은 화면 가장자리 가까이에 길게 펼쳐져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여성을 술의 영향으로 잠든 님프로 설명한다. 

또한 이 자세가 고대 조각으로 알려진 

잠든 아리아드네의 유형을 연상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림 앞에서는 신화적 정체보다 먼저 자세를 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말하고, 마시고, 몸을 움직인다.

이 여인은 다르다.

이미 그 모든 움직임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인다.

몸에 힘이 풀렸다.

바로 옆에서 축제가 계속되는데도 그 소란과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화면 오른쪽 아래는 묘하게 조용하다.


왜 이 누드가 이렇게 강하게 보일까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변 인물들의 몸은 대부분 겹친다.

팔이 다른 사람의 몸을 가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뒤에 들어가며, 

천과 피부가 계속 교차한다.

그런데 오른쪽의 여성은 몸 전체가 비교적 넓게 펼쳐진다.

주변의 작은 움직임들과 달리 하나의 긴 형태를 만든다.

피부의 밝기도 주변의 땅과 식물보다 눈에 잘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잠시 멈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자세의 방향이다.

그녀의 몸은 그림 밖으로 흘러나갈 듯 화면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다.

마치 축제의 에너지가 끝까지 흘러와 마지막에 힘을 잃고 쓰러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을 반드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저 화면을 처음 보았을 때의 활기와 

이곳의 느슨함이 얼마나 다른지만 비교해봐도 충분하다.


아이를 놓치지 말자

오른쪽 아래의 여인만 보고 끝내기 쉬운데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보자.

가까운 곳에 어린아이가 있다.

어른들의 축제 한복판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눈에는 조금 낯설 수 있다.

하지만 티치아노가 참고한 필로스트라토스의 안드로스 이야기에도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함께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언급된다.

그림에서는 이 작은 몸이 성인들의 커다란 육체와 대비된다.

거대한 신들의 의식이라기보다 한 공동체 전체가 축제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도 여기서 생긴다.

그래서 화면을 자세히 볼수록 ‘신화 속 신들의 그림’이라는 첫인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사람의 세계에 가까워진다.


티치아노는 사람을 가지런히 세우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림을 다시 전체로 보자.

인물들의 머리 높이를 이어보면 일직선이 아니다.

몸의 방향도 제각각이다.

서 있는 사람과 앉은 사람, 몸을 숙인 사람과 누운 사람이 반복된다. 

팔은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옆으로 뻗기도 한다.

이 때문에 화면에 리듬이 생긴다.

마치 음악에서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반복되는 것과 비슷하다.

한 사람이 움직임을 시작하면 옆 사람의 몸이 그것을 이어받고, 

다시 다른 팔과 어깨가 방향을 바꾼다.

그래서 그림 전체가 춤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티치아노가 혼란스럽게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질서가 보이지 않도록 질서를 만들었다.

축제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는 색보다 붓이 먼저 보일 때도 있다

실제 티치아노의 그림 앞에 서면 복제 이미지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멀리서는 피부와 천과 나무였던 것이 가까이에서는 물감의 흔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윤곽이 조각처럼 딱딱하게 닫혀 있지 않다.

색과 색이 만나면서 형태가 생긴다.

이 때문에 사람의 피부도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굳어 있기보다 

빛과 공기 속에 놓인 것처럼 느껴진다.

앞 편에서 이야기한 베네치아 회화의 ‘콜로리토’를 여기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선을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채웠다는 느낌보다 

색들이 만나면서 사람이 나타나는 느낌.

그 차이를 직접 찾아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마지막에는 다시 전체를 보자

이제 그림에서 다시 조금 떨어져보자.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어디를 봐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붉은 옷이 보이고, 악보가 보이고, 술을 든 손이 보인다.

사람들의 몸을 지나면 나무와 하늘이 열리고 그 너머로 바다가 이어진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서는 술에 취해 잠든 여인의 몸이 축제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다.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지 않는다.

움직이고, 멈추고, 다시 움직인다.

어쩌면 티치아노가 이 그림에서 가장 잘 그린 것은 

술잔도, 누드도, 풍경도 아닐지 모른다.

그가 그린 것은 취해가는 분위기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고, 음악이 들리는 듯하고, 몸의 긴장이 느슨해지고, 

평소의 질서가 조금씩 풀어진다.

그래서 《안드로스인의 바쿠스 축제》 앞에서는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을 전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림 앞에서 눈을 움직이면 된다.

붉은색을 찾는다.

손을 따라간다.

악보에서 잠시 멈춘다.

사람들의 몸 사이를 지나 먼 바다까지 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아래의 잠든 여인을 바라본다.

그러면 처음에는 뒤엉켜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이 그림은 더 이상 500년 전 신화를 설명하는 삽화가 아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음악이 있고, 술 냄새는 나지 않는데 취기가 있으며, 

누구도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데 화면 전체가 움직인다.

티치아노는 축제를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이 축제에 취하도록 

그림을 만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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