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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르바란 작 《그릇이 있는 정물》 |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보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꽃도 없고 과일도 없다.
식탁이라면 있어야 할 음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네 개의 그릇이 어두운 공간에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허전하지 않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더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개의 그릇과 그 사이의 빈 공간만으로 화면이 이미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수르바란은 수도원과 교회를 위한 종교화로 이름을 얻은 화가다.
그래서인지 사람 하나 없는 이 정물에서도
그의 종교화에서 느껴지는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여기서 종교적인 의미부터 찾을 필요는 없다.
오늘은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따라가 보자.
먼저 네 개의 그릇을 한꺼번에 본다
처음에는 그릇 네 개가 거의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에 금빛이 도는 잔이 있고, 그 옆에는 밝은색의 둥근 물병이 있다.
그다음에는 짙은 갈색의 항아리가 놓여 있고,
맨 오른쪽에는 손잡이가 달린 밝은 물병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이다.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물건을 크게 놓고
주변에 작은 물건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다.
네 개 모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선도 한곳에 오래 붙잡히지 않는다.
왼쪽을 보고, 그 옆을 보고, 가운데의 갈색 항아리를 지나
오른쪽 물병까지 간다.
그러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마치 네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프라도 미술관도 이 그림의 사물들이 완벽하게 정렬된 것은 아니며,
조금씩 방향을 달리해 입체감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그 작은 차이가 그림을 딱딱한 진열장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왼쪽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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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 잔과 밝은 도기 물병 |
왼쪽부터 가까이 가보자.
첫 번째 물건은 넓은 접시 위에 올라간 금빛 잔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아래 받침을 주석제 접시로,
그 위의 잔은 금도금한 은제품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림을 볼 때는 재료의 이름보다
수르바란이 그것을 어떻게 보이게 했는지가 더 재미있다.
잔의 표면 전체가 번쩍거리지 않는다.
빛을 받은 부분만 밝게 살아나고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금속의 모양을 선으로 또렷하게 그려놓았다기보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이어가며 형태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잔 아래의 둥근 접시를 보자.
앞쪽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빛이 걸려 있다.
그 작은 밝음 때문에 검은 배경 속에서 접시의 둥근 형태가 갑자기 드러난다.
그릇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것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빛이 조금만 닿아도 금속은 금속처럼 느껴진다.
두 번째 물병에서는 표면을 보자
그 옆의 물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둥글고 넓은 몸체 위에 좁은 목이 올라가 있다.
양옆으로 손잡이가 붙어 있고, 첫 번째 잔보다 훨씬 묵직해 보인다.
이것은 세비야의 트리아나에서 만들어진
다공성 도기 물병으로 알려져 있다.
물이 도기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증발하면서 안의 물을
시원하게 유지하는 데 이용했던 종류다.
그런데 그림에서는 기능보다 표면이 먼저 느껴진다.
매끈하게 빛나는 금속이 아니다.
빛이 몸체 위에 부드럽게 퍼진다.
가장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경계도 금속 잔보다 훨씬 부드럽다.
수르바란은 같은 빛을 이용하면서도 재료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든다.
왼쪽의 잔에서는 빛이 튕겨 나오는 것 같았다면,
이 물병에서는 빛이 표면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제로 손을 뻗으면 차갑고 조금 거친 도기의 감촉이 느껴질 것 같다.
정물화의 재미가 이런 데 있다.
그림에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눈으로 보고 있으면 자꾸 촉감이 떠오른다.
가운데 갈색 항아리는 왜 유난히 무거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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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색 항아리와 밝은 물병 |
이제 가운데의 갈색 항아리로 시선을 옮겨보자.
네 개 가운데 색이 가장 짙다.
옆의 밝은 물병들과 비교하면 거의 검붉은 갈색에 가깝게 보인다.
몸통은 둥글게 부풀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진다.
양옆의 손잡이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손잡이 전체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부분은 배경 속으로 묻히고 빛을 받은 부분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항아리는 배경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오지 않는다.
밝은 곳에서는 앞으로 나오고, 어두운 곳에서는 다시 뒤의 어둠과 섞인다.
이 물건은 당시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지는 용기다.
프라도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
아마도 오늘날 멕시코의 토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배경을 모르고 봐도 이 항아리가 화면에서 하는 역할은 금방 느껴진다.
색이 바뀐다.
왼쪽의 황금빛과 밝은 도기를 따라오던 눈이 여기에서 갑자기 짙은 갈색을 만난다.
일종의 쉼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림에서 가장 밝게 느껴지는 오른쪽 물병이다.
오른쪽 물병에서 그림이 다시 밝아진다
맨 오른쪽에는 또 하나의 트리아나 도기 물병이 있다.
아래에는 둥근 주석 접시가 받치고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밝은 몸체다.
바로 옆 갈색 항아리와 붙여서 보면 차이가 더 커진다.
어둡고 무거운 갈색 다음에 밝은 물병이 나오면서 화면이 다시 환해진다.
목 부분을 보자.
빛을 받은 한쪽은 밝지만 반대쪽은 빠르게 어두워진다.
손잡이 안쪽에도 짙은 그림자가 생겨 있다.
몸통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진 것도 아니다.
회색과 갈색, 밝은 크림색이 섞여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흰색 계열의 물병이라고 받아들인다.
빛이 가장 강하게 닿는 부분과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래의 접시도 놓치기 쉽다.
접시 대부분은 어둡다.
하지만 가장자리에 빛이 닿으면서 얇고 둥근 선이 생긴다.
그 선 하나가 물병 아래에 단단한 받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왼쪽 첫 번째 잔 아래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림의 양끝이 은근히 서로 연결된다.
왼쪽에는 접시와 잔.
오른쪽에는 접시와 물병.
그 사이에는 두 개의 도기 용기가 놓여 있다.
화면이 단순해 보이면서도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정말 봐야 할 것은 그릇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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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 사이의 어두운 빈 공간 |
이 그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어쩌면 그릇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릇과 그릇 사이를 보자.
수르바란은 네 개를 서로 붙여놓지 않았다.
첫 번째 잔과 두 번째 물병 사이에도 어둠이 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도 빈틈이 있다.
세 번째 갈색 항아리와 마지막 물병 사이에도 검은 공간이 들어간다.
그 빈틈이 생각보다 넓다.
만약 네 개의 물건을 조금씩 밀어 서로 가까이 붙인다고 상상해보자.
그 순간 이 그림의 느낌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릇 몇 개를 모아놓은 평범한 정물처럼 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르바란은 각각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래서 하나를 본 다음 곧바로 다음 물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사이에 있는 어둠을 한번 지나야 한다.
그 짧은 멈춤이 계속 반복된다.
잔.
빈 공간.
물병.
빈 공간.
항아리.
다시 빈 공간.
마지막 물병.
그래서 네 개의 사물은 한 덩어리가 되지 않는다.
각각 독립된 존재처럼 보인다.
프라도의 쉬운 작품 해설에서도 각각의 물건이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짚는다.
이 그림의 고요함은 단순히 배경이 어두워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물 사이에 충분한 침묵을 넣어놓았기 때문에 생긴다.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제 그릇보다 빛을 보자.
전체적으로는 화면 왼쪽 위쪽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각 물체의 왼쪽이나 앞쪽 일부가 밝아지고 반대쪽은 어둠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수르바란은 방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창문도 없다.
촛불도 없다.
빛을 만드는 물건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광원을 직접 보는 대신 그 빛이 물건에 닿은 결과만 본다.
이것이 꽤 중요하다.
주변 공간을 자세히 보여줬다면 우리는 방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르바란은 방을 거의 지워버렸다.
그 결과 빛을 받은 그릇만 남는다.
그리고 그 빛은 네 물건을 똑같이 밝히지 않는다.
금속에서는 날카롭게 반짝이고, 밝은 도기에서는 부드럽게 퍼지고,
갈색 항아리에서는 일부만 건져 올린다.
같은 빛인데 재료마다 반응이 다르다.
그래서 색이 많지 않은 그림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검은 배경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일까
뒤쪽을 보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벽의 장식도 없고 창문도 없다. 그림도, 가구도 없다.
처음에는 그냥 검은색 배경처럼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 어둠이 없으면 앞의 그릇들도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밝은 두 물병은 어두운 배경과 맞닿으면서 윤곽이 또렷해진다.
갈색 항아리는 반대로 배경과 일부가 섞인다.
금속 잔은 작은 반짝임으로 어둠을 뚫고 나온다.
그러니까 검은 배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간이 아니다.
네 개의 물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무대에 가깝다.
또 하나 보이는 것이 있다.
그릇들이 올라가 있는 긴 나무 받침이다.
앞쪽 가장자리가 화면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다.
이 수평선이 없었다면 그릇들은 어둠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수평으로 뻗은 받침이 네 개의 물건을 한 자리에 붙잡아준다.
위쪽은 깊이를 알기 어려운 어둠이고, 아래쪽에는 단단한 수평면이 있다.
그래서 그림은 고요하면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완벽하게 반듯하지 않아서 더 자연스럽다
멀리서 보면 네 물건이 정확하게 줄을 맞춘 것 같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높이가 조금씩 다르고 방향도 조금씩 다르다.
각 물건이 놓인 위치도 기계적으로 맞춰놓은 것처럼 정확하지 않다.
프라도 역시 사물들이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 작은 어긋남이 중요하다.
모든 것을 자로 재듯 맞췄다면 그림이 지나치게 딱딱해졌을 것이다.
수르바란은 질서를 만들었지만 완벽한 대칭을 만들지는 않았다.
왼쪽의 복잡한 금속 잔과 오른쪽의 커다란 밝은 물병도 서로 똑같지 않다.
가운데 두 항아리도 색과 모양이 다르다.
서로 다른 물건인데 이상하게 균형이 맞는다.
그것이 이 그림의 묘한 매력이다.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찾지 말고 조금 떨어져 보자
이제 다시 그림 전체를 보자.
처음에는 그릇 네 개뿐이었다.
하지만 하나씩 보고 나면 조금 달라진다.
금속의 차가운 반짝임이 보이고, 도기의 부드러운 표면이 보인다.
짙은 갈색과 밝은 크림색이 번갈아 나타나고, 그 사이사이로 검은 공간이 들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개의 물건이 서로 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에는 시들어가는 꽃도 없고,
썩어가는 과일도 없으며, 해골이나 시계도 없다.
프라도 역시 이 작품에는 시간의 흐름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거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화면 속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곧 들어와 물병을 집어 들 것 같은 장면도 아니다.
식사가 끝난 흔적도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나 직후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그릇들이 있다.
그런데 수르바란은 그 단순한 상태를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빛나는 금속을 보고, 거친 도기를 보고, 둥근 몸체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물건보다 그 사이의 어둠을 보게 된다.
아마 《그릇이 있는 정물》을 실제로 볼 때
가장 재미있는 순간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네 개의 그릇을 본다.
조금 지나면 네 개의 서로 다른 재질을 본다.
그리고 더 오래 서 있으면 그릇 사이의 빈 공간까지
그림의 일부라는 것을 보게 된다.
수르바란은 화면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오히려 많이 비워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비어 있음 때문에 네 개의 평범한 그릇이
놀랄 만큼 또렷하게 살아난다.
이 그림 앞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서둘러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눈을 옮겨보면 된다.
금빛 잔에서 한번 멈추고, 밝은 물병을 지나고, 갈색 항아리의 어둠을 보고,
마지막 흰 물병에서 다시 빛을 만난다.
그러고 나서 그 사이에 남아 있는 검은 공간을 한번 바라보자.
그때 이 그림이 왜 이렇게 조용한데도 쉽게 눈을 뗄 수 없는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