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61편 안토넬로 다 메시나 《천사가 받치는 죽은 그리스도》 세부 감상, 죽은 몸과 눈물 흘리는 천사

안토넬로 다 메시나, 《천사가 받치는 죽은 그리스도》, 1475~1476년경, 프라도 미술관
안토넬로 《천사가 받치는 죽은 그리스도》

 60편에서는 이 그림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살펴봤다.

이제 그림 바깥의 이야기는 내려놓고 화면 안으로 들어가 보자.

실제 작품 앞에 섰다고 생각하고 먼저 전체를 본다. 

세로로 긴 화면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크게 솟아 있다. 

그 뒤에는 작은 천사가 몸을 받치고 있고, 

두 인물 너머로는 놀랄 만큼 넓은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다음 상처 입은 몸을 따라 시선이 내려간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왼쪽 아래의 해골과 뼈, 천사의 날개 너머 아주 작은 십자가들, 

멀리 보이는 도시와 나무까지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그림 안에 

여러 겹의 거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얼굴을 보자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머리가 뒤로 젖혀져 있다. 

눈은 완전히 감겼고 입은 조금 벌어져 있다. 

목은 길게 드러나고 턱과 코는 위쪽을 향한다.

이 얼굴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시선이 없다.

누군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관람자에게 말을 걸지도 않는다. 

오히려 목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떨어뜨린 자세가 죽음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안토넬로가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아름답게 정돈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긴 머리카락은 얼굴 양쪽으로 흘러내린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가늘게 구분되어 있고, 

수염도 덩어리 하나로 뭉개지지 않는다. 

프라도 역시 이 머리카락의 세밀한 표현을 안토넬로 회화의 

북유럽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꼽는다.

하지만 세밀함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몸의 상태다.

입술은 힘없이 벌어져 있다. 목은 뒤로 꺾였고 머리는 천사의 어깨 쪽으로 기대어 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리스도가 스스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뒤로 젖혀진 그리스도의 얼굴과 눈물을 흘리는 천사
눈을 감은 그리스도와 슬퍼하는 천사의 얼굴


그리스도 뒤에서 울고 있는 작은 천사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조금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천사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비하면 놀랄 만큼 작다.

천사의 머리는 그리스도의 머리보다 뒤쪽에 있고 

몸의 상당 부분도 그리스도에게 가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사가 그리스도를 떠받친다기보다 

그 뒤에서 조용히 붙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눈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고 얼굴에는 눈물이 흐른다. 

프라도의 작품 해설도 천사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이 그림의 강한 감정 표현 가운데 하나로 지적한다.

그런데 천사는 소리 내어 울부짖지 않는다.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고 몸을 과장되게 비틀지도 않는다.

슬픔은 작게 눌려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보인다.

천사의 손은 그리스도의 맨살을 직접 움켜쥐지 않는다. 

푸른 천을 사이에 두고 양팔을 받친다. 

프라도의 쉬운 작품 해설도 천사가 푸른 망토를 이용해 

그리스도의 팔을 붙들며 피부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왼쪽 팔을 보자.

천사의 푸른 천이 그리스도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내려와 팔을 감싸듯 이어진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작은 몸이 죽은 성인 남자의 육체를 실제 힘으로 들어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불가능함이 이 장면을 현실의 장례 장면과 다르게 만든다.

천사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운반하는 사람이 아니다.

관람자 앞에 그 몸을 보여주는 존재에 가깝다.


가슴에서 옆구리의 상처로 내려가자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남은 상처와 아래로 흘러내린 피
그리스도의 가슴과 피 흘리는 옆구리 상처


이제 얼굴에서 목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보자.

가슴이 넓게 드러난다.

어깨와 가슴은 단단하지만 살아 있는 육체의 긴장은 없다. 

양팔은 아래로 떨어져 있고 배에는 미세한 굴곡이 생긴다.

안토넬로는 이 몸을 이상적인 조각상처럼 매끈하게만 만들지 않았다.

몸에는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시선을 잡는 것이 그리스도의 오른쪽 옆구리에 난 상처다.

상처는 작지 않다.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다. 

밝은 피부 위에 놓인 짙은 붉은색이라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도의 목과 가슴에도 작은 핏자국이 보인다. 

프라도는 이것을 가시관을 벗긴 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의 흔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는 피가 단순한 표시가 아니다.

밝은 피부와 붉은 피의 색 차이가 너무 강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추상적인 ‘성스러운 몸’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상처가 난 피부다.

피를 흘렸던 몸이다.

프라도의 해설이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무게와 육체적 고통이 

강하게 강조된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은 죽음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 그리스도의 팔과 몸을 감싸는 흰색과 푸른색 천
늘어진 그리스도의 손과 흰색·푸른색 천


이제 양손을 보자.

화면 오른쪽에 있는 손은 손바닥이 위쪽으로 향한다.

손가락은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힘이 빠진 채 자연스럽게 안으로 굽어 있다.

손바닥에는 붉은 상처가 선명하다.

반대쪽 팔은 화면 왼쪽 아래로 길게 떨어진다.

손목이 꺾이고 손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취하기 어려운 자세다.

이 손이 중요하다.

얼굴은 성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상처는 종교적인 표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힘없이 떨어진 손은 훨씬 육체적이다.

사람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바로 느끼게 한다.

프라도 역시 이 작품의 해설에서 

손목의 굽힘, 손의 단축법, 몸의 곡선과 배의 주름 등을 

안토넬로의 뛰어난 인체 관찰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양손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가 서로 연결된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얼굴에서 가슴으로, 옆구리에서 손으로 움직인다.

안토넬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몸을 따라 확인하게 만드는 셈이다.


흰 천과 푸른 천


몸 아래에는 흰 천이 허리를 감싸고 있다.

여기서 색의 관계를 보자.

그리스도의 피부는 따뜻하고 밝은 색이다.

허리에는 흰 천이 있다.

그 뒤에는 천사의 짙은 푸른 천이 내려온다.

이 세 색이 겹치면서 인물의 몸이 배경에서 앞으로 튀어나온다.

특히 푸른 천의 역할이 크다.

그리스도의 양옆을 따라 내려오면서 몸의 윤곽을 감싼다. 

밝은 피부와 어두운 청색이 맞붙기 때문에 팔과 몸통의 형태가 훨씬 선명해진다.

허리의 흰 천은 표현 방식이 또 다르다.

접히고 꺾인 주름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인다.

부드러운 천이지만 주름의 밝고 어두운 면이 분명해서 

종이를 접어놓은 것처럼 각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다 시선을 아주 조금 아래로 내리면 화면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진다.


왼쪽 아래에 해골이 있다


해골과 뼈 너머로 멀리 골고타의 십자가가 보인다
해골과 십자가


그리스도의 왼팔 아래, 화면 맨 아래쪽을 보자.

해골이 보인다.

주변에는 뼈도 놓여 있다.

처음 그림 전체를 볼 때는 

그리스도의 커다란 몸 때문에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한 번 발견하면 그림의 의미가 달라진다.

이곳이 단순히 아름다운 들판이 아니라 죽음과 연결된 장소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라도의 쉬운 작품 해설은 화면 아래의 해골과 뼈를 근거로 

두 인물이 묘지에 있다고 설명한다.

해골을 보자마자 어떤 상징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먼저 위치가 중요하다.

해골은 화면 한가운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보다 훨씬 작고 화면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리스도의 늘어진 팔 아래에 놓여 있다.

위에는 죽은 그리스도의 몸이 있고 아래에는 이미 뼈만 남은 인간의 죽음이 있다.

살과 뼈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난다.

이 배치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조용히 반복해준다.


천사의 날개 너머를 그냥 지나치지 말자


이제 다시 화면 왼쪽 위로 올라가 보자.

천사의 날개가 있다.

깃털 하나하나의 색과 방향이 다르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이 섞이면서 날개의 부피가 만들어진다.

프라도의 작품 해설에서도 이 여러 색의 날개는 

안토넬로의 뛰어난 세부 묘사를 보여주는 부분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날개 자체만 보고 끝내면 아주 작은 것을 놓친다.

날개 아래쪽 너머의 먼 풍경을 보자.

언덕 위에 작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바로 골고타를 가리키는 부분이다.

이것이 상당히 영리하다.

안토넬로는 십자가형을 화면 중앙에 그리지 않았다.

이미 십자가에서 내려온 그리스도가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 조금 전까지 일어났던 사건의 장소를 아주 멀리 밀어놓았다.

그래서 그림 안에 시간이 생긴다.

멀리 있는 십자가를 보고 다시 앞의 그리스도를 보면

 ‘그곳에서 죽은 몸이 지금 여기까지 왔다’는 연결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제 그리스도 뒤의 세계를 보자


그리스도 뒤로 나무와 들판, 멀리 이어지는 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스도 뒤로 펼쳐진 나무와 도시 풍경


앞의 인물들만 보고 있으면 화면 대부분이 죽음으로 채워져 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시선을 두 사람 사이와 양옆으로 보내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초록빛 들판이 있다.

나무가 자라고 있다.

길이 이어지고 멀리 도시가 보인다.

오른쪽에는 일부가 허물어진 석조 구조물이 화면 가장자리를 막고 있다.

그 너머에는 건물들이 이어지고, 아주 먼 수평선까지 공간이 열려 있다.

프라도는 이 배경의 도시를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동시에 

실제 모습은 안토넬로의 고향 메시나를 반영한 것으로 설명한다. 

중세 성벽과 산 프란체스코 교회를 알아볼 수 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시의 정체보다 화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앞의 몸은 거대하다.

뒤의 도시는 아주 작다.

그 크기의 차이 때문에 공간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 바로 앞에 서 있지만 도시는 아득한 곳에 있다.

인물과 풍경 사이에 엄청난 깊이가 생기는 것이다.


죽음 뒤에 펼쳐진 너무 맑은 하늘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자.

의외로 밝다.

먹구름이 화면을 뒤덮고 있지도 않고 하늘 전체가 비극적인 어둠에 잠겨 있지도 않다.

푸른 하늘이 넓게 열린다.

이 선택 때문에 그림이 묘하게 느껴진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죽었다.

천사는 울고 있다.

피는 아직 몸에 남아 있고 아래에는 해골과 뼈가 놓여 있다.

그런데 뒤쪽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무는 서 있고 들판은 이어지고 도시는 햇빛 아래 놓여 있다.

여기에 반드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붙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안토넬로가 죽음을 표현하면서 화면 전체를 죽음의 색으로 덮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죽은 몸과 살아 있는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대비가 이 그림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다시 전체를 보면 처음과 다르게 보인다


이제 한 걸음 물러나 처음처럼 전체를 보자.

처음에는 그리스도와 천사 두 명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부분이 동시에 들어온다.

뒤로 젖혀진 얼굴.

조금 벌어진 입.

목과 가슴의 핏자국.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

상처 난 손바닥.

힘없이 떨어진 손목.

푸른 천을 사이에 두고 그리스도를 받치는 천사의 손.

천사의 눈물.

왼쪽 아래의 해골과 뼈.

날개 너머의 작은 십자가.

멀리 펼쳐진 도시와 나무.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열려 있는 푸른 하늘.

이 그림의 힘은 어느 하나를 크게 과장하는 데 있지 않다.

안토넬로는 아주 가까운 것과 아주 먼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머리카락 한 올과 멀리 있는 건물을 한 화면에 넣는다. 

피부의 작은 상처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도시 전체가 들어갈 만큼 깊은 공간을 연다. 

프라도가 이 작품에서 북유럽적인 세밀한 묘사와 

이탈리아적인 인체의 부피 및 원근감이 함께 나타난다고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런 화면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작품 앞에서는 그런 미술사 용어를 먼저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의 얼굴부터 보면 된다.

얼굴에서 가슴으로 내려가고, 피를 따라 옆구리를 본다. 

양손의 상처를 확인한 뒤 천사의 얼굴로 돌아간다.

그다음에야 두 사람 뒤를 바라보자.

해골을 찾고, 작은 십자가를 찾고, 멀리 있는 도시를 본다.

마지막에는 하늘까지 올려다보면 된다.

그러고 다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돌아오면 안토넬로가 만든 거리감이 선명해진다.

십자가는 멀리 있다.

도시도 멀리 있다.

하늘은 더 멀리 열린다.

그런데 죽은 그리스도만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다.

안토넬로가 이 작은 나무판 위에서 만들어낸 가장 강렬한 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 속에서 오래전에 일어난 죽음을 멀리 있는 사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 몸을 그림의 가장 앞자리까지 데려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작은 천사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 몸을 받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장면을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몸이 이미 우리 앞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댓글 쓰기

© 나의 세계일주.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Jago Des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