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54편|고야 《1808년 5월 3일》, 그날 밤 마드리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시녀들》에 이어 이번에도 

『프라도 명작산책』 초기에 한 번 지나갔던 작품을 다시 꺼낸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다.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 1814년. 1808년 마드리드 봉기 이후 프랑스군의 보복 처형을 그린 작품
고야 1808년 5월 3일 총살 장면


이 작품 역시 처음 소개했을 때는 

지금처럼 한 작품을 두 편으로 나누는 방식이 정해지기 전이었다. 

전쟁의 역사와 그림 속 총살 장면을 한 글 안에서 함께 설명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그림도 그렇게 한 번에 지나가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왜 프랑스 군인들이 마드리드 시민들을 총살하고 있는가.

왜 제목은 ‘1808년 5월 3일’인데 작품은 1814년에 그려졌는가.

그리고 고야는 왜 전쟁이 끝난 뒤 그 끔찍했던 밤을 다시 거대한 캔버스 위에 불러냈는가.

먼저 이 질문부터 풀어보자.

이번 54편에서는 그림 밖으로 나간다.

1808년의 스페인과 나폴레옹, 마드리드 시민들의 봉기, 

프랑스군의 보복, 그리고 6년 뒤 고야가 

이 사건을 그림으로 남기게 된 과정까지 따라간다.

그림 속 흰옷을 입은 남자의 얼굴과 벌린 두 팔, 

바닥의 등불, 프랑스군의 총구와 쓰러진 시신은 아직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 장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먼저 1808년 5월 2일과 3일의 마드리드로 돌아가야 한다.


스페인 왕실의 싸움에 나폴레옹이 들어왔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의 중심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스페인도 그 거대한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은 카를로스 4세였다.

왕실 내부에서는 국왕과 왕비, 그리고 실력자 마누엘 고도이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이어졌다. 

왕세자 페르난도 역시 아버지의 왕권과 충돌하고 있었다.

이 복잡한 상황에 나폴레옹이 개입한다.

처음부터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정복하러 왔다’고 선언하며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1807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퐁텐블로 조약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포르투갈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군이 스페인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포르투갈로 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스페인의 여러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에도 프랑스군이 들어왔다.

동맹군이라고 생각했던 군대가 

어느 순간 나라 안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사라진 마드리드


1808년 3월 스페인에서는 아란후에스 봉기가 일어났다.

고도이가 실각했고 카를로스 4세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 페르난도가 페르난도 7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왕위 다툼을 중재하겠다는 명목으로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프랑스의 바욘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좌를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겼다.

스페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기막혔다.

자신들의 국왕은 나라 밖으로 떠났고, 프랑스 황제의 형이 스페인의 왕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 마드리드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긴장은 결국 1808년 5월 2일 폭발한다.


1808년 5월 2일,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5월 2일 아침, 마드리드 왕궁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아 있던 스페인 왕실 구성원들까지 프랑스로 떠날 것이라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군중과 프랑스군 사이의 긴장은 곧 폭력으로 바뀌었다.

마드리드 곳곳에서 시민들이 프랑스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 조직된 정규군끼리의 전투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무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맞선 것은 훈련받은 프랑스 제국군이었다.

고야는 이 혼란을 또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남겼다.

바로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또는 맘루크와의 전투》다.

《1808년 5월 3일》과 짝을 이루는 그림이다.

5월 2일의 그림에서는 사람들이 뒤엉켜 싸운다.

누가 공격하고 누가 쓰러지는지 한눈에 정리하기 

어려울 만큼 화면 전체가 혼란스럽다.

그것이 ‘봉기’의 하루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에 보려는 그림은 그다음 장면이다.

싸움이 끝난 뒤 찾아온 밤이다.


봉기의 다음 날에는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드리드의 프랑스군을 지휘하던 조아킴 뮈라는 

봉기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에 맞서 무기를 든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5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 

마드리드 여러 장소에서 처형됐다.

고야의 그림은 이 보복 처형을 다룬다.

전통적으로 작품의 장면은 

마드리드의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 

벌어진 총살과 연결되어 설명되어 왔다.

그래서 두 작품을 함께 놓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선명하다.


5월 2일에는 시민들이 싸운다.

5월 3일에는 사람들이 죽는다.

첫 번째 그림이 폭발이라면 두 번째 그림은 그 폭발 뒤에 찾아온 처벌이다.

이 두 장면은 결국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마드리드에서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점령에 대한 저항은 스페인 곳곳으로 퍼졌고, 스페인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과 포르투갈까지 전쟁에 뛰어들면서 

이베리아반도는 수년 동안 거대한 전쟁터가 됐다.


그런데 고야는 그날 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1808년 5월 3일》이라는 제목 때문에 

고야가 사건 직후 현장을 보고 바로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1814년에 제작됐다.

사건이 벌어진 지 약 6년 뒤다.

프라도 미술관의 공식 작품 정보에도 제작 연도는 181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당시 현장을 그대로 기록한 사진 같은 자료로 보면 곤란하다.

고야가 실제 총살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지도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그가 1808년의 마드리드에 있었고 

전쟁의 시대를 직접 살아낸 것은 사실이지만, 

화면 속 특정 총살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그대로 옮겼다고 말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고야는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날의 사건을 다시 구성했다.

이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그는 한 사람의 정확한 이름과 얼굴을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만들었다.


전쟁을 바라보는 고야의 눈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고야는 이때 젊은 화가가 아니었다.

1746년에 태어났으니 《1808년 5월 3일》을 제작할 때는 예순 후반이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스페인 왕실에서 활동했다.

왕과 왕비를 그렸고 귀족들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궁정의 화려한 세계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하지만 고야의 작품 세계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훨씬 어둡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이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은 결정적인 경험이었다.

고야는 스페인 독립전쟁의 참상을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에도 남겼다.

그곳에는 영웅적인 승리보다 시체와 굶주림, 폭력과 처형,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누가 멋지게 승리했는가보다 

전쟁이 평범한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1808년 5월 3일》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역사화라면 흔히 영웅과 승리, 장엄한 죽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고야가 선택한 것은 승리의 순간이 아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1814년, 전쟁이 끝나고 그림이 시작됐다


시간을 1814년으로 옮겨보자.

오랜 전쟁 끝에 프랑스군은 스페인에서 물러났다.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페르난도 7세의 귀환도 결정됐다.

바로 이 시기에 고야의 두 작품이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최근 프라도 미술관이 강조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과거에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 

페르난도 7세의 마드리드 귀환과 5월 2일 봉기를 

기념하는 거리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됐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프라도의 현재 연구는 그 설명을 수정한다.

남아 있는 행사 문서와 임시 기념물에 관한 기록에서 고야의 두 그림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1814년 2월 섭정평의회가 작품 제작을 의뢰한 문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왕실 문서에서 발견된 액자 비용 기록 등을 근거로 

프라도는 두 그림이 1814년 5월 이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것은 꽤 중요한 변화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작품의 탄생 이야기가 

새로운 문서 연구를 통해 조금씩 수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온 왕과 고야 사이에는 복잡한 현실이 있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페르난도 7세의 귀환 이후였다.

프랑스에 맞선 전쟁 기간 스페인에서는 자유주의적 정치 변화가 일어났고 

1812년 카디스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귀국한 뒤 헌법을 폐지하고 절대왕정을 복원했다.

프라도 자료에 따르면 그는 마드리드에 도착하기 직전 

섭정 정부의 인사들을 체포하고 헌법을 폐지했다.

그러니 《1808년 5월 3일》이 만들어진 

1814년을 단순히 “프랑스에 승리하고 왕이 돌아온 행복한 해”라고 설명할 수 없다.

외세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스페인 내부의 정치적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고야 역시 그 복잡한 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는 프랑스 점령기에도 마드리드에서 활동했고 

조제프 보나파르트 치하에서도 화가로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쟁이 인간에게 남긴 폭력을 작품으로 기록했다.

고야를 어느 한쪽의 단순한 정치적 선전가로만 보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그림에는 승리한 영웅이 없다


이제야 《1808년 5월 3일》이라는 그림의 성격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고야가 선택한 것은 왕의 귀환도 아니다.

승리한 장군도 아니다.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웅도 아니다.

그는 밤중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눈 병사들을 그렸다.

이 선택 때문에 《1808년 5월 3일》은 단순한 스페인 애국주의 그림을 넘어선다.

출발점은 분명 1808년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그림이 보여주는 공포는 특정 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총을 든 사람과 총구 앞에 선 사람.

명령을 수행하는 집단과 죽음을 기다리는 개인.

이 구조는 이후의 수많은 전쟁과 학살의 이미지에서도 되풀이된다.

그래서 후대 미술에서 이 그림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나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같은 작품을 이야기할 때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 자주 함께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야가 만든 처형의 구도가 이후 

현대미술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을 표현하는 

강력한 선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라도에 들어오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1808년 5월 3일》은 세로 268cm, 가로 347cm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이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808년 5월 2일》과 한 쌍을 이룬다.

프라도의 소장 기록에 따르면 작품은 

1814년 마드리드 왕궁에 있었고, 

1834년 이전에는 이미 프라도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처음부터 프라도의 

대표작으로 모두에게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1840년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가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프라도의 정식 카탈로그에 수록된 것은 1872년이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고, 

프라도 미술관에서도 가장 강렬한 전쟁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제목의 날짜를 다시 보자


이제 작품 제목을 다시 읽어보자.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또는 총살》.

날짜 하나가 제목이 되었다.

그 날짜를 모르면 그림은 그저 무서운 총살 장면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5월 2일의 봉기를 알고, 그다음 날의 보복을 알고, 

다시 6년이 지나 1814년에 고야가 이 그림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제목의 의미가 달라진다.


1808년은 사건의 시간이다.

1814년은 기억의 시간이다.

고야는 두 시간을 하나의 그림 안에서 만나게 했다.

그는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날 붓을 든 것이 아니다.

전쟁을 통과하고,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프랑스군이 물러난 뒤에야 다시 1808년의 밤을 불러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볼 때는 “실제로 그날 밤 사람들이 

정확히 이렇게 서 있었을까?”만 묻기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고야는 왜 6년이 지난 뒤 그 밤을 이런 모습으로 기억하게 만들었을까.

그 답은 이제 그림 안에 있다.

거대한 어둠 속에 놓인 등불 하나.

그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두 팔을 벌린 흰옷의 남자.

그를 향해 일렬로 겨누어진 총구.

얼굴을 가린 사람들.

그리고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

역사를 알고 그림 앞에 서면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1808년의 사건을 1814년의 고야가 어떻게 다시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들이다.

이제부터는 역사가 아니라 그림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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