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역사에서 후아나 1세만큼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진 왕도 드물다.
사람들은 그녀를 오랫동안 ‘광녀 후아나’,
스페인어로 ‘후아나 라 로카(Juana la Loca)’라고 불렀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뒤 이성을 잃어버린 여자.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그의 관을 끌고 다닌 여자.
결국 세상과 단절된 채 긴 세월을 갇혀 살았던 비운의 왕비.
후아나를 둘러싼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후아나는 단순히 사랑 때문에 무너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 가운데 하나의 상속자였고,
바로 그 때문에 아버지와 남편, 아들 사이에서
정치적 권력을 빼앗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먼저 ‘광기’라는 말에서 잠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그린 사람은 19세기의 화가였다
![]() |
|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작 《광녀 후아나》 |
여기서 한 가지 시간을 뛰어넘어야 한다.
후아나가 살았던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만나는 《광녀 후아나》는
그로부터 300년 이상 지난 1877년,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이 오르티스가 그린 그림이다.
프라디야는 1848년 사라고사 근처의 비야누에바 데 가예고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무대장치와 장식화 작업을 경험했고,
이후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프라도 미술관에 드나들며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1874년에는 스페인 미술 아카데미의 장학생으로 로마에 갔다.
당시 젊은 스페인 화가에게 로마 유학은 단순한 해외여행이 아니었다.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직접 보고, 유럽 미술계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프라디야가 《광녀 후아나》를 그린 것도 바로 로마에서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 작품은 로마 유학 기간에 자신의 성과를 본국에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1877년 로마에서 공개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듬해인 1878년 마드리드 국립미술전람회에서도
최고 수준의 영예를 얻었다.
같은 해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젊은 프라디야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광녀 후아나》는 이미 유명한 화가가 그린 대표작이 아니라,
젊은 프라디야를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준 작품에 가까웠다.
당시 스페인 미술계에서는 이런 대형 역사화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들은 스페인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거대한 화면에 되살렸다.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역사적 장면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를 통해
‘스페인의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특히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시대, 카를로스 1세의 시대처럼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던 시기는 역사화가들이 즐겨 찾는 무대였다.
후아나 역시 19세기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여왕이면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여자.
남편을 잃은 뒤 광기에 빠졌다고 전해진 여자.
사랑과 질투, 죽음과 왕권이 한 사람의 생애에 뒤엉켜 있는 인물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적 역사관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거의 모두 들어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광녀 후아나》를 통해 만나는 후아나는 16세기의 후아나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300년이 넘는 시간이 놓여 있다.
프라디야는 자신이 살던 19세기의 역사관과 감수성을 통해 후아나를 바라봤다.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역사 서술을 참고했고,
비극적인 사랑과 광기에 사로잡힌 여왕이라는 후아나의 이미지를 극적인 역사화로 만들어냈다.
실제 후아나의 정신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지금도 단순하게 결론 내리기 어렵다.
그런데 19세기 사람들에게 ‘광녀 후아나’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강렬했다.
프라디야 역시 이 인물에게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다.
《광녀 후아나》이후에도 후아나를 주제로 한 작품을 여러 차례 다시 제작했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후아나라는 인물이 프라디야의 평생에 걸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이 작품을 볼 때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기억하면 좋다.
1506년, 남편을 잃은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
그리고 1877년, 그 여왕의 비극을 다시 상상한 스물아홉 살의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는 이 두 시간이 겹쳐져 탄생한 그림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후아나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그대로 기록한 역사적 사진이 아니다.
19세기 스페인이 16세기의 후아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왕실의 딸
후아나는 1479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어머니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였다.
우리가 흔히 ‘가톨릭 군주’라고 부르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이다.
두 사람의 시대에 이베리아반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1492년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이베리아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무너졌고,
같은 해 콜럼버스의 항해도 이루어졌다.
후아나는 바로 이 격변의 시대를 만든 왕실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은 딸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앞선 가족들이 있었다.
그래서 후아나의 미래 역시 당시 유럽 왕실의 공주들에게 흔했던 방식으로 결정됐다.
정략결혼이었다.
왕실의 결혼은 두 사람의 개인적인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가 동맹을 맺는 외교의 수단이었다.
후아나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간 스페인 공주
1496년 후아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다.
우리에게는 흔히 ‘미남왕 필리프’ 또는 ‘필리프 미남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필리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었다.
후아나와 필리프의 결혼은 결국 스페인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연결하는 거대한 왕조적 결합이 됐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되는 카를로스였다.
처음에는 후아나 역시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죽음들이 이어졌다.
왕위 계승자였던 오빠 후안이 죽었고, 언니 이사벨과 그녀의 아들 미겔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왕위가 갑자기 후아나에게 가까워졌다.
한때 왕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공주가 카스티야 왕국의 유력한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후아나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남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신 상태와 결혼생활, 남편과의 갈등까지 모두 권력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남편과 아버지 사이에 놓인 여왕
1504년 어머니 이사벨 1세가 죽자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이 됐다.
문제는 누가 실제로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였다.
후아나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지만 그녀 주변에는 강력한 남자들이 있었다.
아버지 페르난도와 남편 필리프였다.
필리프는 단순히 여왕의 남편으로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페르난도 역시 오랫동안 행사해온 카스티야의 영향력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후아나의 정신 상태에 대한 논란은 이 권력투쟁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다.
후아나에게 실제로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왔다.
그녀가 심한 감정적 불안과 우울,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후대에 만들어진 ‘미친 여자’라는
이미지 전체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특히 그녀가 정치적으로 무능력하다는 판단은 주변 남성들에게 매우 유용했다.
여왕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된다면
누군가는 그녀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아나는 아버지와 남편,
훗날에는 아들에게까지 둘러싸여 실질적인 통치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근대 스페인의 왕비와 여성 권력을 연구한 역사학에서도
후아나의 정신적 문제와 함께 그녀를 둘러싼
남성 왕족들의 권력 경쟁을 중요한 문제로 본다.
그래서 후아나의 이야기를 단순히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로 읽으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녀는 사랑의 비극 속에 있었지만 동시에 왕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506년, 모든 것이 달라지다
1506년 남편 필리프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결혼한 지 약 10년 만이었다.
필리프의 죽음은 후아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후 후아나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의 시신과 함께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해졌다.
실제로 필리프의 시신은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했고
후아나가 그 과정에 함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극적인 전설로 변했다.
죽은 남편을 향한 집착, 질투, 광기 같은 이야기가 덧붙으면서
후아나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사랑 때문에 미친 여왕’이라는 인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리프가 죽은 뒤 벌어진 정치 상황을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남편이 사라졌다고 해서 후아나가 자유로운 여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페르난도가 다시 카스티야의 통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1509년 후아나는 토르데시야스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시작된 생활은 잠깐의 은둔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은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토르데시야스의 여왕
![]() |
| 토르데시야스 |
토르데시야스는 스페인 북서부 카스티야 지역의 작은 도시다.
후아나는 이곳에서 사실상 정치적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갔다.
아버지 페르난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역사 자료는 페르난도가 후아나를 토르데시야스에 둔 채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1516년 페르난도가 죽으면 상황이 바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들이 등장한다.
카를로스였다.
후아나는 여전히 카스티야의 적법한 여왕이었다.
실제 공식 문서에서도 후아나와 카를로스의 이름이 함께 왕으로 기록됐다.
1520년의 문서에서도 ‘후아나와 카를로스’가
카스티야와 레온 등의 군주로 함께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름과 권력은 다른 문제였다.
실제 통치는 카를로스가 장악했다.
어머니가 정치적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아들의 왕권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아나는 왕좌에 있으면서 왕좌에서 밀려난 기묘한 존재가 됐다.
여왕이라는 칭호는 살아 있었지만 여왕으로서의 자유는 거의 없었다.
반란군이 찾아온 여왕
1520년에는 후아나의 처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진다.
카스티야에서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카를로스의 통치 방식과 외국인 측근들의 영향력, 세금 문제 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여러 도시가 왕권에 저항했다.
카를로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을 위해 스페인을 떠난 뒤 반란은 더욱 커졌다.
반란 세력은 토르데시야스에 있는 후아나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후아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카를로스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아나 자신이 카스티야의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코무네로스 지도자 후안 데 파디야를 비롯한 반란 세력은
후아나를 정당한 군주로 내세우려 했다.
후아나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접견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명령서에 서명하는 것은 거부했다.
이 장면은 후아나를 생각할 때 꽤 의미심장하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정치적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이것만으로 후아나의 정신 상태가 완전히 정상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미쳤다’와 ‘미치지 않았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후아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
후아나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반복이 보인다.
남편 필리프가 그녀의 왕권에 개입했다.
아버지 페르난도가 그녀를 대신해 통치했다.
그리고 아들 카를로스 역시 어머니와 공동 군주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실제 권력은 자신이 행사했다.
세 사람의 관계와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후아나는 계속 권력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오늘날 후아나를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광녀’라는 별명이다.
그녀가 평생 아무런 정신적 문제도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반대로 그녀의 모든 행동을 광기로 설명하는 것도 위험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후아나는 당시의 기록과
정치적 이해관계, 후대의 역사 서술이 겹쳐 만들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감정은 쉽게 정치적 무능력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었다.
질투하면 광기였다.
슬픔이 지나치면 광기였다.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도 광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녀 후아나’라는 이름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덮어버렸다.
46년의 시간
후아나는 1509년부터 1555년 죽을 때까지 토르데시야스에서 살았다.
무려 46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스물아홉 살 무렵 들어간 곳에서 일흔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아야 했다.
그 사이 유럽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들 카를로스는 스페인 국왕을 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됐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지배는 빠르게 확대됐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정치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 거대한 왕조의 출발점 한가운데 있었던 여왕은 토르데시야스에 남아 있었다.
왕관을 빼앗긴 것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여왕이라는 지위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통치할 수는 없었다.
후아나의 삶이 특별히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왕위에서 쫓겨난 여왕이 아니라, 왕위에 이름을 올린 채 통치권을 빼앗긴 여왕이었다.
‘광녀’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
후아나는 1555년 토르데시야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어머니와 공동으로 사용하던
카스티야 왕권의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후아나에게는 다른 유산이 남았다.
‘광녀’라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그녀의 정치적 처지까지 가려버렸다.
그래서 후아나를 만날 때는 먼저 질문 하나를 품고 있는 편이 좋다.
정말 한 여인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왕위 계승자였던 한 여성이 권력을 둘러싼 가족과 정치 속에서
점차 자신의 자리를 잃어간 이야기일까.
아마 어느 한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후아나에게 정신적인 고통이 있었을 가능성과 그녀의 상태가
정치적으로 이용됐을 가능성은 동시에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광녀 후아나’라는 오래된 별명이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후아나였다.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 1세.
‘미친 여자’라는 한마디보다 훨씬 복잡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