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40편 티치아노 《다나에》, 황제와 왕들이 찾던 화가가 그린 욕망의 신화

 티치아노의 삶에 대해서는 의외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보티첼리나 조르조네처럼 생애의 상당 부분이 

안개에 싸인 화가와는 조금 다르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유명 화가였을 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같은 

유럽 최고의 권력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었다. 

문인 피에트로 아레티노를 비롯한 당대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기록도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고,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누구와 친하게 지냈고, 

어떤 군주를 위해 일했는지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다만 현대인의 전기처럼 어린 시절의 성격이나 연애, 

일상의 사소한 사건까지 자세히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태어난 해조차 정확한 문서가 없어 논쟁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1490년을 제시하고, 

런던 내셔널 갤러리도 여러 자료와 초기 작품의 양식을 근거로 

대략 1490년 무렵으로 본다.

이번에 볼 《다나에》는 그런 티치아노의 긴 생애 가운데 

거의 정상에 올라 있던 시절의 그림이다.


티치아노, 《다나에》, 1560~1565년경,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 미술관 소장. 황금비로 변한 유피테르를 맞이하는 다나에와 곁에서 황금을 받아내는 늙은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티치아노작 [다나에], 프라도 미술관 소장


젊은 화가가 이름을 알리려고 그린 작품이 아니다. 

유럽의 황제와 왕들이 그의 그림을 기다리던 시대, 

티치아노가 신화를 빌려 인간의 욕망과 육체를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탄생한 작품이다.


산에서 태어나 물의 도시로 간 소년


티치아노의 본명은 티치아노 베첼리오다.

그는 베네치아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고향은 베네치아 북쪽 돌로미티 산맥 기슭의 피에베 디 카도레였다. 

베첼리오 가문은 그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집안이었고, 

아버지 그레고리오는 군사와 행정에 관계된 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 프란체스코도 화가가 되었다.

그런 티치아노가 열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베네치아로 갔다.

지금은 관광도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당시 베네치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지중해와 유럽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역도시였고,

 동방에서 비단과 향신료와 안료가 들어왔다. 

여러 나라의 상인과 외교관이 모였고 엄청난 부가 도시 안으로 흘러들었다.

화가에게도 좋은 도시였다.

교회는 거대한 제단화를 필요로 했고,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했다. 

성공한 상인들은 초상화를 원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읽는 인문주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종교화가 아닌 신화 그림도 중요한 장르가 되어가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처음에는 모자이크 장인 세바스티아노 주카토에게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이어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을 거쳤다. 

특히 당시 베네치아 회화의 중심에 있던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서 

그림을 익힌 경험은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젊은 티치아노에게 더 강렬한 자극을 준 사람이 있었다.

조르조네였다.


조르조네 곁에서 시작된 색채의 화가


1508년 무렵 티치아노와 조르조네는 베네치아의 독일 상인회관인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 외벽 장식에 함께 참여했다.

당시 사람들은 두 화가의 그림을 구별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에서 조르조네의 영향이 강했다. 

자연 속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 이야기를 정확히 설명하기보다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식, 무엇보다 색과 빛으로 

형체를 만들어내는 태도가 서로 가까웠다.

하지만 조르조네는 1510년 무렵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잠재적인 경쟁자가 사라진 뒤 티치아노는 놀라운 속도로 

베네치아 회화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1518년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설치된 

거대한 《성모승천》은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힌 작품이었다.

여기서부터 티치아노의 삶은 단순한 ‘베네치아의 유명 화가’ 이야기를 넘어간다.

이탈리아 여러 궁정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우르비노의 델라 로베레 가문이 그의 고객이 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와 파르네세 가문도 티치아노에게 초상을 주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카를 5세였다.


황제의 얼굴을 그리게 된 화가


티치아노는 1530년 볼로냐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만났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었다.

티치아노는 황제의 초상을 그렸고 

이후 카를 5세가 가장 신뢰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황제와 그 가족의 초상을 여러 차례 제작하면서 

티치아노의 명성은 이탈리아 밖까지 퍼졌다. 

당시의 화가에게 왕과 황제의 초상을 맡는다는 것은 

단순한 주문 하나를 받는 일이 아니었다. 

유럽 최고의 권력층이 그 화가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에 가까웠다.

티치아노에게는 명예와 특권도 주어졌다.

그래서 16세기 유럽 미술에서 티치아노의 위치는 조금 특별하다. 

왕에게 고용되어 궁전에 머무는 평범한 궁정화가와도 달랐다. 

그는 베네치아에 자신의 작업실을 유지하면서 

유럽 각지의 군주와 귀족에게 그림을 보내는 국제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에게 그림을 주문하려면 기다려야 했다.

티치아노는 주문을 빨리 처리하는 화가도 아니었다. 

작품을 오래 붙들고 수정하는 경우가 있었고, 

주문자가 그림을 재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다.

황제조차 그의 고객이었다.

화가와 군주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티치아노가 살던 시대에 화가는 더 이상 단순히 주문받은 이미지를 제작하는 

이름 없는 장인이 아니었다.

뛰어난 화가는 자신의 이름 자체가 가치가 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그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림 밖에도 사람이 많았던 티치아노의 삶

그의 사생활도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티치아노는 1525년 체칠리아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폼포니오, 오라치오, 라비니아 세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체칠리아는 1530년 세상을 떠났다. 

티치아노는 이후 오랫동안 화가로 활동했고 

아들 오라치오는 아버지의 작업실과도 관계를 맺었다.

티치아노 주변에는 화가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특히 중요한 사람이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와 

조각가이자 건축가 야코포 산소비노였다. 

두 사람은 1520년대 후반 베네치아에 자리 잡았고 티치아노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당시 베네치아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화가, 문인, 건축가가 서로 교류하면서 작품을 소개하고 

후원자를 연결하고 명성을 만들어갔다. 

특히 아레티노는 유럽의 권력자들과 넓은 서신망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티치아노가 국제적인 명성을 넓히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티치아노를 작업실에 틀어박혀 색채만 연구하던 

고독한 천재로 생각하면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사람을 알았고, 궁정을 알았고, 자신의 그림이 누구에게 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화가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세계 속에서 《다나에》가 등장한다.


탑에 갇힌 공주에게 황금비가 내리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고스의 공주다.

그녀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의 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그는 그 운명을 피하려고 다나에를 외부 남자와 만날 수 없는 공간에 가둔다.

하지만 인간이 문을 잠근다고 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우스, 로마식 이름으로 유피테르는 다나에에게 접근하기 위해 

황금비의 모습으로 변한다.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가 훗날 영웅 페르세우스가 된다.

결국 아크리시오스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예언도 실현된다.

신화의 표면만 보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에게 이 이야기는 특별한 가능성을 제공했다.

여성의 누드를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너스처럼 다나에도 고대 신화 속 인물이었으므로 

종교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육체와 사랑, 욕망을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티치아노에게 다나에는 한 번 그리고 끝나는 주제가 아니었다.


티치아노는 왜 《다나에》를 여러 번 그렸을까


티치아노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다나에》를 그린 것은 

1544~1545년 로마 체류 무렵이었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을 위해 제작된 그림으로, 

오늘날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다나에 곁에 큐피드가 등장한다.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보관된 다나에
티치아노작 [다나에],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보관


이후 티치아노는 구도를 바꾸어 같은 주제를 여러 차례 다시 제작했다.

여기서 프라도의 《다나에》를 볼 때 꼭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다나에》가 펠리페 2세에게 처음 보내진 바로 그 《다나에》는 아니다.

오랫동안 두 작품의 관계가 혼동되기도 했지만 현재 프라도는 이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펠리페 2세가 1553년에 받은 《다나에》는 

현재 런던 앱슬리 하우스의 웰링턴 컬렉션에 있다. 

프라도의 그림은 그 뒤인 1560~1565년 무렵 제작된 또 다른 버전이다. 

유화로 캔버스에 그렸으며 크기는 129.8×181.2cm다.

프라도 판에서 눈여겨봐야 할 변화가 있다.

초기 파르네세 판의 큐피드 대신 늙은 여인이 등장한다.

이 변화 때문에 그림은 단순히 아름다운 누드 한 사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벗어난다.

젊음과 늙음, 매끄러운 피부와 거친 피부, 벌거벗은 몸과 옷으로 덮인 몸,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과 황금을 받아내려는 사람이라는 대조가 만들어진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이 대비를 이 버전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한다.

세부 모습은 2편에서 천천히 볼 부분이다.

지금은 티치아노가 왜 이런 신화를 반복해서 그릴 수 있었는지만 기억하면 된다.

그에게는 그런 그림을 원하고 이해하는 고객이 있었다.


펠리페 2세와 ‘포에지에’


카를 5세와 맺은 관계는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이어졌다.

티치아노는 1550년대부터 펠리페를 위해 일련의 대형 신화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그림들을 단순히 ‘신화 그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포에지에poesie, 즉 ‘시’라고 불렀다.

그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시인이 단어로 신화를 새롭게 만들어내듯 

자신은 색채와 육체, 풍경으로 신화를 다시 만든다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나에》와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시작으로 

《디아나와 악타이온》, 《디아나와 칼리스토》,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에우로페의 납치》 등이

 이 흐름에 들어간다. 

내셔널 갤러리는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된 

이 신화화 연작을 티치아노 말년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 신화를 정확하게 삽화처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티치아노는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을 골라 인간의 몸과 감정을 보여주었다.

사랑을 기다리는 순간, 금지된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사냥을 떠나려는 연인을 붙잡는 순간, 인간이 신의 욕망에 휘말리는 순간이 그림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화화는 문학을 읽는 것과 조금 다르다.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 몸으로 느끼게 한다.

《다나에》 역시 바로 그런 그림이다.


그런데 프라도의 《다나에》는 어떻게 스페인에 왔을까


여기에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벨라스케스다.

프라도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현재 프라도의 《다나에》는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된 그림이 아니라 후대 버전이며, 

17세기에 벨라스케스를 통해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들어왔다.

1634년 왕실 관리 헤로니모 데 비야누에바는 부엔 레티로 궁전을 

장식할 그림 18점의 대가로 벨라스케스에게 1,000두카도를 지급했는데, 

그 목록에 티치아노의 《다나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벨라스케스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인 

1629~1631년 무렵 이 작품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논의되어 왔다. 

다만 정확히 어느 도시에서 어떤 경로로 구입했는지는 완전히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이 재미있는 이유가 있다.

벨라스케스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티치아노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신화 그림이 한 세기 가까이 지나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를 거쳐 스페인 왕실로 들어온 셈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다시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에 남아 있다.

《다나에》 한 점 속에 16세기 베네치아와 합스부르크 왕실, 

17세기 벨라스케스와 스페인 궁정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오래 살았기에 한 화가 안에서 시대가 바뀌었다


티치아노를 이해할 때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다.

그의 활동 기간이 대단히 길었다는 사실이다.

1500년대 초 젊은 조르조네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 1550~60년대에는 

펠리페 2세를 위해 혁신적인 신화화를 그리고 있었다.

초기의 그림에서는 형태가 비교적 단단하고 색의 경계도 분명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붓질은 점점 자유로워졌다. 

가까이에서 보면 물감이 뭉개지고 형태가 풀어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생긴다. 

하지만 몇 걸음 물러나면 그 붓자국들이 피부와 천, 빛과 공기로 바뀐다.

프라도의 《다나에》는 바로 이 후기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의 작품이다. 

프라도 역시 이 작품에서 이전 버전보다 붓질이 한층 풀어진 후기의 제작 방식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림을 단순히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여성 누드”라고만 

보면 티치아노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젊은 시절 조르조네와 함께 베네치아 회화의 새로운 색채를 만들었던 사람이 

수십 년 뒤에는 형태 자체를 빛과 물감 속에 녹여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화가의 생애 안에서 베네치아 르네상스 회화가 크게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든이 넘어서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


티치아노는 노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1570년대에 이르면 그의 그림은 더욱 거칠고 자유로워진다. 

젊은 시절처럼 사물을 또렷한 윤곽선으로 마감하기보다 

여러 겹의 색과 붓자국을 겹쳐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내셔널 갤러리는 티치아노 말년의 회화가 

거의 추상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로워졌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악타이온의 죽음》 같은 후기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붓자국 하나하나가 그대로 드러난다.

1576년 베네치아에 전염병이 퍼졌다.

티치아노도 그해 8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아들 오라치오 역시 그 무렵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묻혔다. 

젊은 시절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높여준 《성모승천》이 있는 바로 그 성당이다.

한 인간의 생애로 보면 묘한 귀환이다.

산골 카도레에서 태어난 소년이 베네치아로 와 화가가 되었고, 

황제와 왕의 얼굴을 그렸으며, 유럽 각지의 궁전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준 도시의 성당 안에 묻혔다.


《다나에》 앞에서 먼저 기억할 것


이제 프라도에서 《다나에》를 만나면 단순히 침대에 누운 벌거벗은 여인부터 볼 필요는 없다.

이 그림 뒤에는 아주 긴 화가의 인생이 있다.

돌로미티 산골에서 베네치아로 건너온 소년이 있었다.

조반니 벨리니에게 배우고 조르조네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가 되었고 이탈리아 여러 궁정의 귀족들이 그를 불렀다.

카를 5세가 자신의 얼굴을 맡겼고,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티치아노에게 고대 신화를 그림으로 된 

‘시’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색을 다루어온 노화가는 

한 젊은 여인의 몸 위로 신이 황금비가 되어 내려오는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그렸다.

현재 프라도에 걸려 있는 것은 1560~1565년 무렵 제작된 

그 후기 버전 가운데 하나다. 

처음 펠리페 2세에게 보내졌던 《다나에》와는 다른 작품이고, 

한 세대 뒤 벨라스케스를 거쳐 스페인 왕실 컬렉션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이 그림은 고대 신화만을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다.

티치아노라는 화가가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에는 다른 거장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던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을 상대로 자신이 그리고 싶은 방식으로 

신화를 다시 만들어내는 화가가 되었다.

그 긴 세월 끝에서 티치아노는 《다나에》를 이야기의 삽화처럼 그리지 않았다.

신이 어떻게 여인을 찾아왔는지를 설명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황금과 빛으로 변해 

인간의 세계에 스며드는 순간을 회화로 바꾸었다.

이것이 우리가 프라도의 《다나에》 앞에 서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그림 바깥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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