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명작산책 52편 벨라스케스 《시녀들》, 왕궁의 한 장면이 미술사의 수수께끼가 되기까지

 『프라도 명작산책』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글의 형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떤 작품은 시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림 속 인물을 들여다봤고, 

어떤 작품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세부 감상이 한 글 안에 뒤섞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 비교적 일찍 소개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이었다.

당시에는 3편에서 이 거대한 작품을 한 편으로 끝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시녀들》은 한 편에 모든 이야기를 담기에는 

너무 많은 질문을 품고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시작한다.

52편에서는 그림 밖으로 나가 1656년의 마드리드와 스페인 왕실, 

그리고 말년의 벨라스케스를 만나본다. 

왜 이런 그림이 왕궁 안에서 탄생했는지를 먼저 이해하려 한다.

53편에서는 설명을 멈추고 그림 안으로 들어간다. 

마르가리타 공주에서 시작해 두 시녀와 벨라스케스, 

거울 속 국왕 부부, 열린 문 앞의 남자, 오른쪽의 두 인물과 

개까지 실제 작품 앞에서 눈을 움직이는 순서대로 살펴볼 생각이다.

그리고 《시녀들》 다음에는 역시 시리즈 초기에 한 편으로 다뤘던 

고야의 《1808년 5월 3일》도 다시 두 편으로 정리하려 한다.

그 작품 역시 전쟁과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총살 직전의 사람들·총구·등불·어둠을 직접 바라봐야 

보이는 부분이 너무나 분명하게 나뉘는 그림이다.

초기에 지나갔던 프라도의 대표작들을 다시 꺼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 번 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쉬운 글을 그대로 남겨두기보다는, 

지금의 『프라도 명작산책』 방식으로 제대로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시녀들》이다.


Las_Meninas


우리가 알고 있던 ‘스페인 황금시대’의 뒤편

《시녀들》은 1656년에 그려졌다.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2번 방에 걸려 있으며, 

크기는 세로 320.3cm, 가로 279.1cm에 이른다. 

책이나 휴대전화 화면에서 볼 때와 실제 작품 앞에서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상이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크기다.

하지만 1656년이라는 연도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17세기 스페인을 흔히 ‘스페인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실제로 문학과 미술에서는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졌다. 

세르반테스가 있었고, 벨라스케스가 있었으며, 

수르바란과 무리요 같은 화가들이 활동했다.

그러나 문화의 황금기와 국가의 현실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벨라스케스가 《시녀들》을 그리던 1650년대의 스페인은 

이미 16세기의 압도적인 패권국가와는 달랐다.

오랜 전쟁은 국가 재정을 소모시켰고,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스페인 왕실에 맞서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같은 해 카탈루냐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시녀들》이 그려진 지 3년 뒤인 1659년에는 프랑스과 피레네 조약을 맺는다.

유럽 정치의 중심축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시녀들》은 모든 것이 

상승하던 제국의 자신감 속에서 나온 그림이라기보다, 

거대한 왕조가 여전히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뒤편에서는 불안이 커지고 있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 중앙의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왕실의 미래가 된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5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펠리페 4세, 

어머니는 그의 두 번째 왕비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였다.

《시녀들》이 제작된 1656년의 마르가리타는 대략 다섯 살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를 그저 그림 중앙의 사랑스러운 어린 공주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당시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왕의 자녀는 한 가족의 아이인 

동시에 왕조의 미래와 연결된 존재였다.

특히 이 무렵 스페인 왕실의 후계 문제는 민감했다.

펠리페 4세에게는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있었지만, 

그는 1646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조를 이어갈 남성 후계자의 죽음은 

단순한 가족의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왕조 전체의 계승 문제가 흔들렸다.

《시녀들》이 그려진 1656년에는 

훗날 왕위 계승자로 기대를 받게 되는 펠리페 프로스페로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인 1657년에 태어난다.

따라서 화면 중앙의 마르가리타를 둘러싼 왕실의 시선에는 

단순한 가족 초상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시녀들》에 관한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로 왕조의 지속과 관련된 정치적 의미를 소개한다.

물론 벨라스케스가 “왕조의 미래를 그리겠다”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시녀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의 문장에 갇히지 않는 그림이다.


그림의 무대는 실제 왕궁이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 그림의 공간은 벨라스케스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궁전 내부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이 소개하는 

18세기 화가이자 미술 저술가 안토니오 팔로미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장면의 무대는 당시 마드리드 왕궁이었던 

알카사르의 ‘왕자 방Cuarto del Príncipe’이었다.

그곳은 원래 일찍 세상을 떠난 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사용했던 공간이었고, 이후 벨라스케스가 작업 공간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시녀들》의 성격이 묘해진다.

왕실 가족을 궁전의 화려한 공식 접견실에 세워놓은 그림이 아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에 어린 공주와 궁정 사람들이 들어와 있고, 

그 공간 어딘가에 국왕과 왕비가 존재한다.

왕과 왕비는 화면 중심에 당당하게 서 있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뒤쪽 거울 속에서 발견된다.

왕실 초상화라면 당연히 

가장 중요한 사람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벨라스케스는 그 익숙한 질서를 흔들어버렸다.

누가 주인공인지조차 한 번에 결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마르가리타 공주일까.

국왕과 왕비일까.

그들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일까.

아니면 이 모든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일까.

바로 여기서 《시녀들》은 평범한 궁정 초상화의 범위를 넘어가기 시작한다.


벨라스케스는 왜 자기 자신을 그렸을까


벨라스케스는 이때 이미 젊은 궁정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1623년 마드리드 궁정에 들어와 

오랫동안 펠리페 4세를 가까이에서 섬겼고, 

《시녀들》을 그릴 무렵에는 왕실 안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과 궁정에서 일하는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시녀들》 속에 등장하는 

벨라스케스를 단순한 ‘화가의 자화상’으로만 보면 부족하다.

그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서 있다.

한 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캔버스의 뒷면이 우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질문이 시작됐다.

벨라스케스는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거울에 비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 가운데 하나는 국왕과 왕비가 그림 바깥, 

즉 오늘날 관람객이 서 있는 방향에 있고 

벨라스케스가 그들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쉬운 해설 자료 역시 이 장면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시녀들》에는 오랫동안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왔다.

그래서 “관람객이 서 있는 자리가 정확히 왕과 왕비가 서 있던 자리다”라고 

하나의 정답처럼 못 박기보다는, 

거울과 화가의 시선이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을 강하게 제시한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다.

벨라스케스는 확실한 답보다 질문을 남긴다.


화가는 손으로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는 당시 화가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는 문제도 있다.

오늘날에는 화가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살던 시대에는 회화가 지적인 자유예술인가, 

손으로 만드는 기술적인 작업인가를 둘러싼 문제가 

화가의 사회적 위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가 왕실 구성원들과 같은 공간 안에 

자신을 세워놓은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구석에 숨어 그림을 만드는 이름 없는 장인이 아니다.

왕과 왕비를 바라보고, 왕실 가족과 공간을 공유하며,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그림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가 회화를 단순한 손기술이 아니라 

지성과 사고가 필요한 활동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해석을 소개한다.

그림 뒤쪽 벽에 걸린 작품들 역시 이런 해석과 연결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조심할 것이 하나 있다.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보이는 붉은 산티아고 기사단 십자가다.

그것을 보고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귀족적 지위를 

자랑하기 위해 그려 넣었다”고 바로 결론 내리면 시간 순서가 맞지 않는다.

벨라스케스가 산티아고 기사단에 들어간 것은 

《시녀들》이 제작된 1656년보다 뒤인 1659년이다.

따라서 현재 화면에 보이는 붉은 십자가는 작품이 

처음 완성될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정하기 어렵다.

이 작은 십자가 하나만 보더라도 

《시녀들》에는 ‘그려진 순간’ 이후의 역사까지 겹쳐 있다.


처음부터 ‘시녀들’이라는 제목도 아니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부르는 《시녀들》이라는 제목에도 역사가 있다.

1656년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완성한 순간부터 모두가 이 작품을 

‘라스 메니나스’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다.

프라도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1666년 마드리드 알카사르의 재산 목록에서는 

이 작품이 대략 ‘시녀와 난쟁이를 거느린 황녀의 초상’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1734년 알카사르 화재 이후의 기록에서는 

‘펠리페 4세의 가족’으로 불렸고, 이후에는 

간단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오늘날 익숙한 《Las Meninas》라는 제목이 

프라도 미술관의 카탈로그에 등장한 것은 1843년이었다.

‘메니나menina’는 왕실의 어린 공주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던 귀족 집안 출신의 시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정작 화면 중앙의 공주도, 거울 속 국왕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도 아닌 ‘시녀들’을 가리키고 있다.

제목부터 이 그림의 중심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왕의 공간에서 미술관의 공간으로


《시녀들》은 처음부터 수많은 사람이 보는 미술관용 그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왕실 컬렉션에 속해 있었고, 왕궁의 공간에 놓여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 공식 자료에 남아 있는 소장 이력을 따라가면 

마드리드의 옛 알카사르에서 새 왕궁으로 이동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73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옛 알카사르에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수많은 작품이 위험에 처했고 일부는 소실되었다.

《시녀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왕실 컬렉션을 기반으로 프라도 미술관이 문을 연 뒤, 

왕의 사적인 공간에 가까웠던 이 그림은 수많은 관람객이 바라보는 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아주 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왕이 바라보던 그림을 이제는 우리가 바라본다.

그런데 그림 속 거울에는 여전히 왕과 왕비가 있다.

벨라스케스는 여전히 화면 밖을 바라본다.

그래서 21세기의 관람객이 작품 앞에 서는 

순간 1656년의 그림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림 바깥에 있던 우리의 자리가 갑자기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피카소가 다시 《시녀들》 앞에 섰던 이유


이 그림 앞에서 멈춘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다.

300년 뒤 파블로 피카소도 《시녀들》을 다시 바라봤다.

1957년 피카소는 프랑스 칸의 작업실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집중적으로 해석하는 연작을 제작했다.

여기서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이 소장한 연작 전체는 58점이다. 

현재 미술관의 분류에 따르면 그 가운데 45점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해석한 작품이고, 

나머지는 비둘기 그림과 풍경, 자클린의 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카소는 벨라스케스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다.

화면을 해체하고 다시 만들었다.

인물의 크기를 바꾸고 색을 바꾸고 형태를 변형했다.

그럼에도 출발점은 1656년 벨라스케스가 만든 그 이상한 방이었다.

그만큼 《시녀들》은 한 시대에 끝나지 않는 그림이었다.

후대의 화가에게도 계속해서

 “그림이란 무엇인가”, “화가는 무엇을 보는가”, 

“그림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시녀들》을 다시 시작한다


예전에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나는 《시녀들》의 매력을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설명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질문에 조금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

《시녀들》은 단순히 거울 하나를 기발하게 사용한 그림이 아니다.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있고, 

후계 문제를 품은 왕실이 있고, 다섯 살의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다.

그 곁에는 수십 년 동안 펠리페 4세를 그려온 늙어가는 궁정화가가 있다.

그리고 벨라스케스는 그 모든 존재를 왕궁의 한 방 안에 모아놓았다.

왕은 그림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림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가는 그림을 만드는 사람이면서 그림 속 인물이 된다.

공주는 중앙에 있지만 제목의 주인공은 아니다.

관람객은 그림 밖에 서 있지만 어느 순간 그림 속 시선들의 목적지가 된다.

그래서 《시녀들》 앞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면 그림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프라도 미술관이 이 작품을 두고 ‘보는 행위’와 ‘회화와 현실의 경계’, 

그리고 그 안에서 관람객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그림이 태어난 1656년의 방까지 왔다.

남은 일은 하나다.

그 방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보는 것이다.

그때부터 《시녀들》은 왕실 가족을 그린 오래된 명화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막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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