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앞에서는 처음부터 작은 것을 찾지 않는 편이 좋다.
먼저 조금 떨어져 화면 전체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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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 데르 베이던 작《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앙을 가로질러 축 늘어진 예수의 몸이다.
그런데 그 아래에 또 하나의 몸이 거의 같은 방향으로 쓰러져 있다.
성모 마리아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아들의 죽음을 보고 의식을 잃었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닮은 곡선을 그린다.
이 그림을 보는 출발점은 바로 이 두 몸이다.
먼저 예수와 성모를 함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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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와 성모의 평행 구도 |
예수의 몸만 따라가 보자.
십자가에서 막 내려진 몸에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고, 팔은 아래로 떨어지며, 무릎도 힘없이 굽어 있다.
몸을 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질 것 같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면 성모의 몸이 보인다.
푸른 옷을 입은 성모 역시 뒤로 쓰러진 채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지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그림에서 성모가 예수와
시각적·서사적으로 같은 정도의 비중을 가지며,
의식을 잃은 성모의 자세가 죽은 아들의 자세를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둘의 몸을 번갈아 보면 그 관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의 머리가 기울어진 방향과 성모의 머리가 기울어진 방향이 서로 호응하고,
축 늘어진 팔과 굽은 몸도 비슷한 흐름을 만든다.
완전히 똑같이 복사한 자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몸이 같은 리듬을 만든다는 점이다.
위에는 죽은 아들이 있고 아래에는 그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되풀이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래서 성모의 슬픔은 표정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몸 전체가 슬픔의 형태가 된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가 마치 아들과 함께 죽음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 표현 가운데 하나다.
죽은 예수의 몸에는 힘이 없다
이제 예수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보자.
예수의 몸에서 먼저 느껴지는 것은 무게다.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자기 몸을 스스로 지탱할 수 없는 죽은 몸이다.
팔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손가락에도 힘이 없다.
몸을 받쳐주는 사람들의 동작 때문에 예수의 무게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머리에는 여전히 가시관이 남아 있다.
얼굴에는 수난의 흔적이 있고, 프라도의 작품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옆구리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도 보인다.
몸을 감싼 흰 천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그 아래의 피와 피부가 비쳐 보일 정도다.
여기서 판 데르 베이던의 세밀한 묘사가 힘을 발휘한다.
피를 많이 보여줘 충격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백해진 피부와 축 늘어진 몸, 작은 상처와 핏자국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웅적인 장면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놓인 한 인간의 죽음처럼 다가온다.
성모의 얼굴에는 색이 빠져 있다
이번에는 예수에게서 성모의 얼굴로 내려가 보자.
성모는 눈을 감고 있다.
아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상태다.
얼굴에는 생기가 거의 없다.
프라도 미술관도 예수의 회색빛 피부와 의식을 잃은 성모의 창백한 피부가 이루는
대비를 이 작품의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다.
이 차이는 미묘하다.
예수는 죽었다.
성모는 살아 있다.
하지만 판 데르 베이던은 두 사람의 피부색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죽음과 실신을 시각적으로 연결한다.
성모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인 동시에 그 죽음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되풀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예수와 성모를 따로 떼어 보기 어렵다.
한 사람의 몸을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몸으로 눈이 움직인다.
슬픔은 모든 얼굴에서 똑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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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와 성 요한의 표정과 손 |
이제 중앙에서 주변 인물들로 시선을 옮겨보자.
놀라운 점은 모두가 슬퍼하지만 아무도 똑같이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모는 아예 의식을 잃었다.
성 요한은 쓰러지는 성모를 붙잡으면서 몸 전체를 앞으로 내민다.
그의 눈은 울어서 붉어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프라도의 복원 전문가 조지 비사카 역시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슬픔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성 요한 뒤쪽의 여인들도 보자.
한 여인은 손으로 눈물을 닦거나 얼굴 가까이에 손을 가져가며 슬픔을 드러낸다.
또 다른 여인은 성모를 부축한다.
누군가는 얼굴로 울고, 누군가는 손으로 울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몸을 붙잡으며 슬퍼한다.
판 데르 베이던은 ‘슬픔’이라는 하나의 감정을 여러 종류의 몸짓으로 나눈다.
그래서 인물 수가 많아도 감정이 단조롭지 않다.
오른쪽 끝의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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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라 마리아의 자세와 맞잡은 손 |
이제 화면 오른쪽 끝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그녀의 자세는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몸짓 가운데 하나다.
허리를 깊게 굽히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슬픔을 견디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 자세를 신체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굽어진 자세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바로 그 과장이 감정을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모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성 요한처럼 누군가를 붙잡지도 않는다.
두 손을 단단히 모으고 자신의 몸을 안쪽으로 접는다.
슬픔이 바깥으로 폭발하기보다 몸 안으로 압축되는 듯하다.
여기서 그녀의 손을 유심히 보면 좋다.
판 데르 베이던에게 손은 얼굴 못지않게 중요한 감정의 언어다.
기도하는 손처럼 보이면서도 단순한 기도 자세와는 다르다.
손가락을 서로 얽어 붙잡은 모습에는 견디려는 긴장감이 있다.
그녀의 굽은 허리와 맞잡은 손이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면서
화면 오른쪽 끝의 감정을 단단히 묶는다.
손만 따라가도 그림이 보인다
이제 얼굴을 잠시 잊고 손만 찾아보자.
그림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예수의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다.
성모의 손에도 힘이 없다.
반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예수의 몸을 받친다.
성모를 붙든다.
눈물을 닦는다.
두 손을 맞잡는다.
천을 잡는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죽은 사람과 의식을 잃은 사람은 손에 힘이 없다.
그 주변의 살아 있는 사람들은 손을 움직여 두 사람을 붙잡는다.
즉 이 그림에서 손은 단순한 세부 묘사가 아니다.
누가 힘을 잃었고 누가 그 사람을 지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얼굴보다 손에서 감정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예수의 몸을 받치는 사람들
중앙으로 다시 돌아오자.
예수의 시신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내려지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의 현재 작품 해설에서는
오른쪽의 화려한 금빛 옷을 입은 인물을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 설명한다.
흰 수염을 지닌 니고데모는 흰 수의를 이용해 예수의 몸을 받치며,
사다리 위의 젊은 남자도 예수의 팔을 지탱하고 있다.
다만 프라도는 이 젊은 인물의 정확한 서사적 정체에는 의문이 남는다고 밝힌다.
이들을 볼 때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 자세를 보는 편이 재미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은 긴장되어 있다.
무거운 시신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몸을 기울이고 팔에 힘을 준다.
반면 예수에게서는 그런 긴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대비 때문에 그림인데도 실제 무게가 느껴진다.
예수의 몸이 ‘그려져 있다’기보다 사람들이 정말 그 몸을 받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물은 작지만 그림 전체를 움직인다
이 그림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판 데르 베이던은 슬픔을 과장된 얼굴 표정만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과 뺨을 타고 흐르는 작은 물방울을 세밀하게 그렸다.
프라도 미술관도 대부분의 인물이 울고 있으며,
화가가 다양한 몸짓을 통해 그들이 사건을 심리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눈물은 아주 작다.
그런데 그 작은 물방울 때문에 얼굴이 갑자기 살아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울부짖는 장면보다 오히려 조용하다.
그래서 슬픔이 더 오래 남는다.
눈물이 피부 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15세기 플랑드르 화가들이 보여준 정밀한 관찰력은 보석이나
비단 같은 아름다운 물질을 묘사할 때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울 때 눈가가 젖고 뺨에 물방울이 남는 순간에도 사용되었다.
판 데르 베이던은 그 작은 흔적을 놓치지 않는다.
빨강과 파랑이 감정을 나눈다
이번에는 인물들의 얼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색을 보자.
화면에서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색은 파랑과 빨강이다.
성모의 깊은 푸른 옷은 화면 아래쪽에서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성 요한의 강렬한 붉은 옷은 왼쪽에서 시선을 붙잡는다.
오른쪽에는 금빛과 붉은 계열의 화려한 옷이 이어진다.
이 색들은 단순히 인물을 구별하기 위한 표식처럼만 작동하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기 때문에 색이 없었다면
인물들의 몸은 서로 뒤엉켜 보였을 것이다.
판 데르 베이던은 강한 색면을 이용해 각각의 몸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한다.
특히 성모의 파랑은 화면의 무게중심을 아래쪽에 잡아준다.
성 요한의 빨강은 왼쪽에서 강하게 튀어나온다.
오른쪽의 금빛 옷은 반대편에서 그 힘을 받아준다.
그래서 중앙의 창백한 예수와 성모가 더욱 선명해진다.
주변은 색으로 움직이지만 중심의 두 사람에게서는 색이 빠져나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옷은 화려하다.
죽은 예수의 피부는 창백하다.
실신한 성모의 얼굴 역시 색을 잃었다.
색채가 생명과 죽음의 차이를 조용히 보여주는 셈이다.
흰 천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예수의 몸 주변에는 흰 천이 있다.
장례를 위해 사용될 수의다.
이 천은 단순한 소품처럼 보이지만 화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창백한 예수의 몸과 가까운 밝기를 만들면서 몸의 윤곽을 따라간다.
동시에 사람들의 손과 예수의 몸 사이를 연결한다.
프라도의 쉬운 작품 해설은 이 천이 매우 투명하게 묘사되어
그 아래의 피부와 피까지 비쳐 보인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판 데르 베이던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흰색을 두껍게 칠해 천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천 아래의 피부가 얼마나 보여야 얇은 직물처럼 느껴지는지 계산한다.
피부, 피, 천이 한곳에서 겹친다.
작은 부분이지만 초기 네덜란드 회화가 왜 물질의 표현에서 특별한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닥의 해골과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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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하단의 해골과 뼈 |
시선을 아주 아래로 내려보자.
전경에는 작은 해골과 뼈가 놓여 있다.
너무 많은 인물과 화려한 옷을 먼저 보게 되기 때문에 놓치기 쉽다.
프라도 미술관은 이것을 골고타가 아담이 묻힌 장소였다는 전승과 연결해 설명한다.
하지만 그림을 볼 때는 상징부터 외울 필요가 없다.
먼저 위치를 보자.
죽은 예수의 몸 아래, 거의 관람자의 눈앞에 놓여 있다.
사람들의 거대한 몸에 비하면 작지만 죽음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다.
화려한 색의 옷과 금빛 배경 아래에 아주 작은 죽음의 흔적이 놓여 있는 셈이다.
그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전승과 연결하면 의미가 훨씬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이상할 정도로 깊이가 없는 공간
이제 마지막으로 인물들 뒤를 보자.
보통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면 뒤에 풍경이나
건축물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없다.
인물들은 금빛의 얕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돌출된 상부와 금빛 배경, 측면, 모서리의 장식까지 포함해
이 그림이 15세기 북유럽의 채색 조각 제단을 떠올리도록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인물들이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
서로 겹치고 부딪치며 화면 앞쪽으로 밀려 나온다.
이것이 그림의 감정을 더 강하게 만든다.
만약 뒤에 푸른 하늘과 먼 산, 예루살렘의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면
우리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판 데르 베이던은 그 탈출구를 막았다.
눈이 머물 곳은 사람밖에 없다.
화면 양끝이 다시 안쪽으로 돌아온다
구도를 조금 더 크게 보면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다.
화면의 중심에서는 예수와 성모의 몸이 길게 휘어져 내려간다.
그리고 양쪽 끝의 인물들은 몸을 안쪽으로 굽힌다.
왼쪽의 성 요한은 성모를 향해 몸을 뻗고, 오른쪽의 막달라 마리아는
깊이 굽은 몸으로 화면 안쪽을 향한다.
양끝에서 인물들의 자세가 일종의 괄호처럼 중심을 감싼다.
그래서 인물이 많아도 시선이 화면 밖으로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왼쪽에서 시작하면 중앙으로 들어오고,
중앙을 지나 오른쪽까지 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돌아오게 된다.
판 데르 베이던은 사람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몸을 하나의 커다란 선처럼 연결했다.
결국 이 그림에서 슬픔은 하나의 모양이 된다
이제 다시 처음처럼 몇 걸음 물러서 보자.
처음에는 예수의 죽음이 보였다.
조금 가까이에서는 성모의 실신이 보였다.
더 가까이 가면 붉어진 눈과 눈물이 보이고, 맞잡은 손과 힘없이 떨어진 손이 보인다.
다시 물러서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몸이 휘어진다.
성모의 몸이 그 움직임을 되풀이한다.
성 요한의 몸이 성모를 향해 기울어진다.
오른쪽 끝의 막달라 마리아도 몸을 굽힌다.
손은 붙잡고, 받치고, 닦고, 맞잡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금빛이 인물들을 나누고 다시 연결한다.
그런데 그 모든 움직임이 좁은 금빛 공간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슬픔은 어느 한 사람의 얼굴에만 있지 않다.
그림 전체가 슬픔의 형태를 하고 있다.
프라도의 복원 전문가 조지 비사카가 이 작품에서 인물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정도의 비탄이 표현되어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을 가리킨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만나면 눈물부터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먼저 예수와 성모의 두 몸을 찾아보자.
그 두 몸이 얼마나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본다.
그다음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손을 보고, 옷의 색을 따라간다.
마지막으로 다시 전체를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처음에는 복잡하게 보였던 열 명의 인물이 하나의 감정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슬픔을 설명하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힘없이 떨어진 팔 하나, 누군가를 붙잡는 손 하나, 휘어진 몸 하나를
이어 붙여 슬픔 자체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는 ‘누가 누구인가’를 모두 외우는 것보다
먼저 몸의 방향을 보는 편이 좋다.
죽은 아들의 몸과 쓰러진 어머니의 몸.
그 두 개의 곡선을 발견하는 순간,
600년 가까이 된 그림이 갑자기 아주 인간적인 장면으로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