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서 15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이야기할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 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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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높이 204.5cm, 폭 259cm에 이르는 커다란 목판에 유채로 그린 작품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현재 이 그림을 1443년 이전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제작 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1443년에 이미 이 작품을 본뜬 것으로 판단되는
초기 모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전에는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작품을 프라도의 대표적인 플랑드르 회화로 만나지만,
처음부터 왕궁이나 미술관을 위해 만들어진 그림은 아니었다.
출발점은 지금의 벨기에 뢰번Leuven에 있던 한 예배당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그림 앞에 서면 작품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단순히 성경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기도하고 슬퍼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체험하도록 만든 종교 이미지였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지던 곳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이 활동했던 15세기 전반의 네덜란드 지역은
오늘날의 국경으로 생각하면 조금 혼란스럽다.
우리가 흔히 ‘플랑드르 회화’ 또는 ‘초기 네덜란드 회화’라고 부르는 세계는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문화권에서 발전했다.
당시 이 지역의 주요 도시들은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 아래 있었고,
브뤼헤·브뤼셀·겐트·뢰번 같은 도시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부유한 궁정과 귀족만 미술을 주문한 것도 아니었다.
도시의 교회와 수도원, 상인, 직업 조합과 종교 단체도 중요한 주문자가 되었다.
그림은 오늘날처럼 미술관 벽에서 감상하기 위한 독립적인 예술품이라기보다
예배와 기도, 신앙생활 속에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환경에서 북유럽 회화 특유의 놀라운 세부 묘사가 발전한다.
보석의 반짝임, 모피의 부드러움, 금속의 차가운 광택, 피부와 머리카락, 눈물, 옷감의 주름까지
집요하게 그려낸다.
작은 표면 하나도 대충 처리하지 않는다.
유화 기법은 이런 표현에 특히 잘 어울렸다.
물론 ‘유화를 플랑드르 화가들이 발명했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유성 재료 자체는 이전에도 사용되었다.
다만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화의 가능성을 크게 발전시켰고,
투명한 색층을 겹쳐 깊은 색과 미세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데 놀라운 수준에 도달했다.
얀 반 에이크가 그 정밀한 시각 세계를 대표한다면,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가 특별히 잘했던 것은 인간의 감정을 화면 전체의 구조로 바꾸는 일이었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사람의 감정을 그린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1399년 무렵 투르네에서 태어나 1464년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모든 과정을 정확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다만 로베르 캉팽과 연결되는 투르네의 회화 환경에서 수련했고,
이후 브뤼셀에서 중요한 화가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1430년대 중반 브뤼셀의 공식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판 데르 베이던은 종교화와 초상화에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작품과 구도는 유럽 각지에서 반복해서 모방되었다.
그런데 판 데르 베이던의 그림을 볼 때
단순히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는가”만 보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그의 진짜 힘은 감정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다.
슬퍼하는 사람을 한 명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에게 서로 다른 강도의 슬픔을 나누어 준다.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감정을 억누르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붙잡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감정이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전달된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순간은 왜 중요했을까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강하’, 즉 죽은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준비하는 순간이다.
복음서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요청하고,
니고데모 등이 장례 과정에 참여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판 데르 베이던은 이 사건을 단순한 역사적 장면처럼 재현하지 않았다.
중세 후기의 신앙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어떤 슬픔을 느꼈는지를 상상한다.
신자는 그 고통에 감정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한다.
따라서 그림도 감정을 일으켜야 했다.
성경 내용을 설명하는 삽화에 그쳐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림 앞에 선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느끼게 해야 했다.
판 데르 베이던은 이 목적에 놀라울 정도로 잘 맞는 화가였다.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은 왕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제작 배경에는 아주 흥미로운 주문자가 등장한다.
뢰번의 대석궁수 조합, 즉 크로스보우 길드였다.
프라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은 뢰번의 성벽 밖 성모 교회에 있던 대석궁수 조합의 예배당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림의 양쪽 위 장식 부분에는 작은 석궁 모양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이 주문자의 정체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중세와 초기 근대 유럽의 길드는 단순한 직업 단체가 아니었다.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조직이면서 동시에 도시 공동체의 일부였고,
종교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수호성인이나 성모에게 봉헌된 제단과 예배당을 마련하고
미사를 드렸으며, 공동체를 위해 종교 미술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개인이 혼자 감상하기 위해 소유한 작품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예배 공간에서 사용되는 제단화였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크다.
우리는 지금 프라도 미술관의 조명 아래에서 이 작품을 ‘미술사의 걸작’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15세기 뢰번의 사람들은 먼저 신앙의 대상으로 만났다.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훌륭하게 그렸는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얼마나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가였다.
왜 그림이 조각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을까
이 작품의 제작 목적을 이해할 때 하나 더 알아둘 것이 있다.
15세기 북유럽 교회에서는 여러 인물을 조각해 색을 칠한 다채색 목조 제단화가 널리 사용되었다.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회화이면서도
그런 조각 제단을 의식한 듯한 구조를 갖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도 이 작품의 돌출된 상부 형태와 금빛 배경, 좁고 상자처럼 느껴지는 공간,
모서리의 장식이 당시 조각 제단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한다.
화가는 평평한 목판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마치
실제 인물 조각들이 제단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 선택은 단순한 눈속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회화가 조각과 경쟁하는 셈이다.
조각은 실제 공간을 차지한다.
사람이 옆으로 움직이면 조각의 입체감도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림은 평면이다.
판 데르 베이던은 그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꾼다.
실제 조각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만들어놓고,
조각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피부색과 눈물, 옷감의 질감, 미세한 표정과
감정의 차이를 회화로 보여준다.
프라도의 보존 전문가 조지 비사카도 이 작품을 당시 북유럽의 조각 제단 형식을
회화로 모방하면서 동시에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설명한다.
그 때문에 이 그림을 멀리서 처음 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사건이 벌어지는 실제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금빛 상자 안에 놓인 거대한 종교 조각들을 보는 듯하다.
현실과 제단의 세계가 겹쳐진다.
르네상스 시대지만, 이탈리아와는 다른 길
이 작품이 만들어진 15세기 전반은 이탈리아에서는
초기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대다.
피렌체에서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초 같은 인물들이
새로운 공간과 인간의 몸을 탐구하고 있었다.
선원근법을 이용해 화면 안에 논리적인 공간을 만들고,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북유럽 화가들이 이탈리아보다 ‘뒤처져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방향이 달랐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사물의 표면과 빛, 재료의 질감, 인간의 얼굴과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관찰했다.
판 데르 베이던에게도 공간을 사실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을 일부러 포기한 듯한 구성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이야기를 현실적인 장소에 펼쳐놓는 것보다 인물들의 감정을
한곳에 밀집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넓은 풍경이 아니었다.
슬픔이 빠져나갈 수 없는 무대였다.
그림 속 공간이 좁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기서 작품 전체를 아주 잠깐만 바라보자.
세부 감상은 다음 단계에서 해야 하지만, 제작 의도를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구조 정도는 볼 필요가 있다.
그림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뒤로 펼쳐지는 넓은 예루살렘 풍경은 없다.
인물들은 얕은 금빛 공간 안에 거의 가득 들어차 있다.
마치 커다란 상자 안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 같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은 실수가 아니다.
판 데르 베이던은 깊은 배경을 보여주는 대신 사람들을 앞으로 끌어낸다.
그리스도의 죽은 몸도, 쓰러지는 성모도, 주변 사람들의 슬픔도
관람자의 눈앞 가까이에 놓인다.
도망갈 공간이 없다.
감정도 흩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 작품의 종교적 기능과 정확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교회에서 이 그림을 바라보던 사람은
먼 옛날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사건을 멀리서 구경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그 죽음과 슬픔 앞에 서 있는 증인이 된다.
성모의 슬픔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겹쳐진다
이 작품의 주제가 단순히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이라고만
생각해서도 부족하다.
판 데르 베이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모의 슬픔을 강하게 연결한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이 작품에서 성모가 그리스도와 거의 같은 수준의
시각적·서사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의식을 잃은 성모의 몸은 그리스도의 축 늘어진 몸과
서로 대응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중세 후기의 성모 신심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통에도 감정을 이입했다.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슬픔.
두 고통이 한 화면에서 겹쳐진다.
그래서 이 작품의 비극은 한 사람의 죽음에 머물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관람자 역시 그 슬픔의 바깥에 서 있기 어렵게 된다.
로히어르가 만든 새로운 종교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당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판 데르 베이던이 복음서의 사건을 다루면서
세부에서는 현실감을 극대화하고, 인물들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 배치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구성 능력이 15세기 플랑드르 시각문화에 강한 영향을 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즉, 모든 것을 현실처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사실적으로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현실은 과감하게 없앴다.
피부와 눈물과 옷은 실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간은 실제 같지 않다.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무대는 조각 제단처럼 압축되어 있다.
이 모순이 오히려 그림을 강렬하게 만든다.
우리가 실제 사건을 보고 있는 것인지, 성스러운 제단을 보고 있는 것인지 경계가 흔들린다.
뢰번에서 합스부르크 왕실로
이 그림의 이후 행로도 흥미롭다.
처음에는 뢰번의 대석궁수 조합 예배당에 있었지만,
약 한 세기가 지난 뒤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결된다.
프라도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작품은 헝가리의 마리아가 소유하게 되었고,
그녀의 빈슈 성에 있는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1549년에는 이미 빈슈 성에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 작품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소장품이 되었고,
1564년에는 엘 파르도 궁전의 소장품 목록에서 확인된다.
이어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헝가리의 마리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여동생이자 펠리페 2세의 고모였다.
이 작품이 도시의 길드 예배당에서 합스부르크 왕실의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판 데르 베이던의 명성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이 완성된 지 약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1551년에 출판된 기록에는 빈슈에서 이 작품을 본 스페인 측 인물이
그 자연스러움과 경건함을 극찬한 내용도 전한다.
결국 뢰번의 작은 종교 공동체를 위해 제작된 그림이 유럽 최강의 왕조 가운데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실의 보물이 된 셈이다.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까지
작품은 오랫동안 엘 에스코리알에 머물렀다.
프라도 미술관의 현재 소장 이력에 따르면 1574년부터 1936년까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있었으며, 1936년 스페인 내전기에
문화재 보호를 위한 조치 속에서 프라도로 옮겨졌다.
1943년 법령에 따라 프라도 미술관에 임시 기탁되었고,
현재도 파트리모니오 나시오날 소유로 프라도에 영구 대여된 작품이다.
그러니 우리가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보고 있다고 해서 소유 관계까지 단순하게
‘프라도의 그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작품에는 뢰번의 길드 예배당에서 시작해 합스부르크 왕실과
엘 에스코리알을 거쳐 마드리드에 도착한 긴 이동의 역사가 들어 있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58번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만나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앞에 서기 전에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다.
이 그림은 처음부터 ‘명화’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작품이 아니었다.
15세기 뢰번의 한 예배당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었다.
주문자는 왕도 교황도 아니었다.
도시의 대석궁수 조합이었다.
그런데 그 주문을 받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성경의 사건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조각 제단처럼 보이는 좁은 금빛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거의 실제 사람 크기의 인물들을 밀어 넣었다.
현실적인 풍경은 사라졌지만 사람의 감정은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6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그림은 낡은 종교 삽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몸을 내려놓는 순간과 그 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슬픔이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판 데르 베이던이 그린 것은 단순한 ‘십자가 강하’가 아니었다.
그는 죽음 하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15세기 플랑드르의 종교화는 시대를 넘어서는 힘을 얻는다.
프라도에서 이 작품을 만날 때는 먼저 세부를 찾기보다
한두 걸음 떨어져 전체를 바라보는 편이 좋다.
왜 배경이 거의 사라졌는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 있는지.
왜 회화인데 조각 제단처럼 느껴지는지.
그 질문들을 떠올리고 바라보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정교하게
잘 그린 오래된 그림에서 벗어난다.
뢰번의 한 예배당에서 사람들을 기도하게 만들었던
15세기의 이미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