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서 라파엘의 《추기경의 초상》을 만나면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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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 작 [추기경의 초상] |
추기경이라는 것은 옷차림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은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후보가 있지만, 아직 누구라고 확정할 수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라파엘이라는 사실이다.
1510년 무렵의 라파엘은 로마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활동하던 곳은 단순한 종교 도시가 아니었다.
교황과 추기경들이 유럽의 정치와 외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의 중심이었다.
《추기경의 초상》은 바로 그 세계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1510년, 라파엘은 로마에 있었다
라파엘은 1508년 무렵 로마로 향했다.
당시 교황은 율리우스 2세였다.
율리우스 2세는 교황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로마를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려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이 진행됐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라파엘에게도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바티칸 궁전의 교황 거처를 장식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라파엘로의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
라파엘은 이 작업을 통해 단숨에 로마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추기경의 초상》이 그려진 1510~1511년경은 바로 이 시기와 겹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단순히 라파엘이 어느 성직자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로마의 권력 중심에 들어간 젊은 화가가
그곳의 최고위층 인물을 그린 초상화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당시 추기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늘날 ‘추기경’이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를 떠올린다.
물론 당시에도 그렇다.
하지만 16세기 초 로마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황은 종교 지도자이면서 교황령을 통치하는 군주였다.
따라서 교황 주변의 추기경들도 종교뿐 아니라
행정과 외교,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일부는 막대한 재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왕과 군주들도 로마 교황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런 시대에 초상화를 남긴다는 것은 단순히 얼굴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인가.”
이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는 일이었다.
라파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름을 모를까
여기에서 이 작품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그림은 남았는데, 그림 속 사람의 이름은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인물이 후보로 등장했다.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라는 주장도 있었고, 베르나르도 도비치 다 비비에나, 반디넬로 사울리 등의 이름도 거론됐다.
그리고 현재 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프란체스코 알리도시(Francesco Alidosi) 추기경이다.
프라도 미술관 역시 알리도시를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로 소개한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선을 하나 그어야 한다.
그림 속 인물이 알리도시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프라도의 공식 작품 설명에서도 여러 후보를 검토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작품의 공식 제목 역시
특정 인물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추기경》이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알리도시는 누구였을까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당시 로마에서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추기경이었다.
교황의 신임을 바탕으로 빠르게 높은 지위에 올랐고,
교황청의 정치와 행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라파엘과 연결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알리도시는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고,
라파엘과 같은 시대의 예술가들과 접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학자들은 프라도의 초상화를 보면서
알리도시를 떠올렸을까.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도 알리도시의 얼굴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1508~151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알리도시의 초상 메달이 남아 있다.
메달에 새겨진 옆얼굴과 라파엘의 초상 속 얼굴을 비교하면
서로 닮았다고 볼 만한 부분이 있다.
이런 자료가 알리도시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작품을 소개할 때는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로 추정된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만약 정말 알리도시라면
알리도시라는 이름이 흥미로운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의 마지막 때문이다.
알리도시는 1511년 라벤나에서 살해됐다.
교황령을 둘러싼 정치적·군사적 갈등 속에서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에게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라파엘의 《추기경의 초상》은 대략 1510~1511년경 제작된 것으로 본다.
시기가 묘하게 겹친다.
만약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정말 알리도시라면,
라파엘은 그의 생애 마지막 무렵 모습을 남긴 셈이다.
물론 그림 속 표정을 보고 죽음을 예감했다거나
불안한 운명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그림이 제작된 로마는 아름다운 예술만 꽃피던 평온한 도시가 아니었다.
교황과 추기경, 군주와 귀족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전쟁과 외교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르네상스의 찬란함과 권력의 긴장이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
라파엘은 왜 이런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라파엘은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젊은 화가에게 로마의 최고위층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맡겼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얼마나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바티칸에서의 성공 덕분에 라파엘은
교황 주변의 권력자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을 닮게 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개인의 얼굴을 살리면서도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품위를 함께 보여줘야 했다.
프라도 미술관도 이 작품에서 라파엘이
모델의 개별적인 특징과 추기경이라는 지위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결합했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추기경의 초상》은 단순한 인물 기록을 넘어선다.
한 사람의 얼굴이면서 동시에 르네상스 로마 권력자의 얼굴이 된다.
이름은 사라졌는데 얼굴은 남았다
이 그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500년 전에는 누구나 알아보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교황 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추기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름은 그림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란벨라라는 주장도 나왔다.
줄리오 데 메디치라는 주장도 있었다.
비비에나와 사울리도 후보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프란체스코 알리도시가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그러나 아직 물음표는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물음표 때문에 그림의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이름은 잃어버렸는데, 존재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라파엘이 남긴 힘이다.
1510년 무렵 로마에서 한 추기경이 젊은 라파엘 앞에 앉았다.
그가 알리도시였는지, 다른 추기경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당시 로마의 높은 곳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사실만큼은 그림 전체에서 느껴진다.
한쪽에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움직이던 르네상스 로마가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스물일곱 살 남짓의 라파엘이 있었다.
그리고 두 세계가 만난 자리에 이 초상화가 남았다.
이름을 잃어버린 추기경과, 그의 얼굴을 500년 뒤까지 남겨버린 화가.
그렇게 생각하고 프라도에서 이 그림을 만나면,
《추기경의 초상》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