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미술관에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관람객을 압도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틴토레토의 《발 씻김》도 그중 하나입니다.
높이 약 2.1m, 가로 길이는 무려 5.3m가 넘습니다.
그림이라기보다 하나의 커다란 벽면을 바라보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 속 인물부터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16세기 베네치아로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베네치아의 화가가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틴토레토는 어떤 화가였으며, 당시 베네치아 미술은 피렌체와 무엇이 달랐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성경 이야기 가운데 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이 거대한 제단화의 주제가 되었을까요?
오늘은 그림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이 작품이 태어난 시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틴토레토작 [발씻김] |
틴토레토,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화가
틴토레토의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입니다.
그는 1518년경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594년까지 거의 평생을 베네치아에서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틴토레토(Tintoretto)’는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가 염색업자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염색공을 뜻하는 tintore에서 나온 별칭으로,
흔히 ‘작은 염색공’ 또는 ‘염색공의 아들’ 정도의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가 태어난 16세기 초 베네치아는 유럽에서도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지중해와 동방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도시 곳곳에는 교회와 궁전, 공공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부유한 귀족과 종교단체들은 자신의 건물을 장식할 그림을 원했습니다.
화가들에게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조금 다른 미술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피렌체에 선이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색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이야기하면 보통 피렌체부터 떠올립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이 대표적입니다.
피렌체 미술에서는 정확한 형태와 인체, 선을 이용한 구성과 원근법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조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색채와 빛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물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운하와 석호 위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빛과 습한 공기는 도시의 풍경 자체를 독특하게 만들었습니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선으로 형태를 또렷하게 구분하는 것만큼 색과 빛을 이용해 분위기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이러한 베네치아 회화의 전통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틴토레토 역시 바로 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배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틴토레토 앞에는 티치아노라는 거대한 산이 있었습니다
틴토레토가 젊은 화가였을 때 베네치아에는 이미 최고의 스타가 있었습니다.
티치아노(Titian)입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이름을 날리던 화가였습니다.
황제 카를 5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같은 유럽 최고 권력자들이 그의 작품을 원했습니다.
젊은 틴토레토가 이런 거장과 같은 도시에서 경쟁해야 했던 것입니다.
틴토레토가 잠시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 배웠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 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와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점차 다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인물들은 더 격렬하게 움직이고, 공간은 깊어지며, 구도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흔들립니다.
그림을 안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기보다 관람객이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발 씻김》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르네상스가 끝나가던 시대의 화가
《발 씻김》은 1548~1549년경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는 미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때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라파엘로 역시 사망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화가들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완벽한 균형과 안정된 구도를 일부러 비틀기도 했고,
인물의 자세를 복잡하게 만들거나 공간을 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흔히 매너리즘(Manierism)이라고 부릅니다.
틴토레토를 단순히 매너리즘 화가라는 한 단어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화려한 색채가 남아 있으면서도
매너리즘의 과감한 공간 구성과 인물 표현이 나타납니다.
동시에 강렬한 빛과 움직임에서는 훗날 등장하는 바로크 미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틴토레토는 르네상스의 전통을 물려받으면서
그 이후의 미술로 넘어가는 과정에 서 있었던 화가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발 씻김》은 어떤 이야기를 그린 것일까?
작품의 주제는 요한복음 13장에 등장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른 뒤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오늘날에는 이 행동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바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길은 먼지가 많았고 사람들은 샌들을 신었습니다.
집에 들어온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대개 낮은 신분의 사람이 담당했습니다.
그런 일을 스승인 예수가 직접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자신의 스승이 자신의 발을 씻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제자의 발 앞에 몸을 낮추는 장면에는
초기 기독교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겸손과 봉사입니다.
높은 사람이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 몸을 낮춥니다.
그래서 ‘발 씻김’은 기독교 미술에서 단순한 일상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예수가 직접 보여준 섬김의 모습을 상징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처음부터 미술관을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프라도 미술관의 넓은 전시실에서 이 작품을 봅니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사람들이 미술관 정면에서 그림을 감상할 것을 생각하며 그린 것이 아닙니다.
작품은 원래 베네치아의 산 마르쿠올라 교회(Chiesa di San Marcuola)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종교화는 지금처럼 독립된 미술품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건축과 함께 기능했습니다.
그림이 어느 벽에 걸리는지, 사람들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어떤 방향에서 작품을 바라보는지가 중요했습니다.
《발 씻김》 역시 원래 교회 공간과 관람자의 위치를 고려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프라도에서 작품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몇 가지 의문도 풀립니다.
왜 주인공이 저기에 있을까?
왜 공간이 저렇게 이상하게 깊어질까?
왜 그림의 중심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 답은 상당 부분 원래 그림이 걸렸던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다음 편에서 실제 화면을 보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가톨릭 미술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틴토레토가 활동한 16세기는 유럽 종교사에서도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 기독교 세계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가톨릭교회도 이에 대응하면서 내부 개혁을 추진했고,
1545년에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시작됩니다.
《발 씻김》이 제작된 것도 바로 이 무렵입니다.
종교화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신앙의 의미를 전달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발 씻김이라는 주제는 화려한 기적보다 예수가 직접 보여준
겸손과 봉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거대한 그림 속에서 신자들은 성경을 글로 읽는 대신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것처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틴토레토는 그런 종교적 이야기를 단순한 설명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바꾸었습니다.
베네치아 교회에서 프라도까지
이 작품의 여행도 꽤 흥미롭습니다.
베네치아 교회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은 훗날 원래 장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는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유명한 미술 컬렉션에 들어갑니다.
찰스 1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술품 수집가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내전 끝에 왕이 처형되면서 왕실 컬렉션도 흩어지게 됩니다.
《발 씻김》 역시 매각되었습니다.
이후 작품은 스페인으로 건너왔고 스페인 왕실 컬렉션에 들어갔습니다.
한때 엘 에스코리알에 보관되었던 이 거대한 베네치아 그림은
결국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교회에서 시작해 영국 왕실을 거쳐 스페인 왕실로 이동한 셈입니다.
작품 한 점이 지나온 길만 보더라도 16~17세기 유럽 왕실과 미술품 수집의 역사가 함께 보입니다.
이제 그림 앞에 서볼 차례입니다
여기까지 알고 다시 《발 씻김》을 바라보면 처음과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예수가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는 성경화가 아닙니다.
그 뒤에는 16세기 해상도시 베네치아가 있습니다.
티치아노가 이끌었던 베네치아 회화의 전통이 있고,
르네상스의 안정된 질서에서 벗어나려던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흔들리던 유럽의 종교적 상황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화면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었던
틴토레토라는 화가가 있습니다.